고맙습니다(부제: '데보네어 드라이브' 역자 후기) 번역작품들

  블로그를 하고 있던 어느날, 중앙북스의 L 편집자 님으로부터 시무라 타카코의 모 만화를 번역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내 상황은 잉여잉여하고 있는 와중이라 일을 가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해서 덜컥 해보겠다고 했고,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희대의 망번역으로 돌아왔다. 암튼 당시 중앙북스는 일본 만화를 의욕적으로 출간하려고 했고, L 편집자 님은 정발 후보작 중 하나를 내게 주면서 의견을 들려달라고 했다. 그 만화가 바로 아사쿠라 세카이이치의 '데보네어 드라이브'였다. 난 그 만화를 단숨에 읽고 L 편집자님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유머감각은 좋지만 우리나라에서 먹힐 만한 유머감각인지는 모르겠다'라고 했던 것 같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난 원래 아사쿠라 세카이이치의 만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자유롭고 헐렁한 그림체와 부담스럽지 않게 귀여운 유머감각이 상당히 매력적이라 생각했고, 그의 만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만화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발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난 당시 '파레포리'가 상당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실제 판매부수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만화 판매시장이 일반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혹독한 환경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었다. 난 그 만화가 시베리아와 북극 사이의 어디쯤 되는 가혹한 만화 시장에서 살아남기에는 좀 약하다고 생각했다.

  내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편집부 내부에서 GO 사인이 났던지, 데보네어는 용감하게 쓰가루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데보네어 드라이브'의 번역은 내가 맡게 되었다. 일정 상 시무라 타카코의 모 만화와 함께 진행하게 됐는데 아무래도 시무라 타카코의 모 만화가 기대작이었던지라 상대적으로 '데보네어 드라이브'에 쏟아지는 관심은 좀 적었던 듯싶다. 물론 번역을 특히 더 대충 했다는 건 아니고 아무래도 시무라 타카코의 모 만화에 출간일정이 밀리는 경향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출간일정이 계속 밀리다 보니 교정지 상에서 역자 교정을 볼 일이 많아졌는데, 교정지로만 한 3교 정도를 본 것 같다. 번역하기 전과 번역하면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책 전체를 한 예닐곱 번은 본 셈이다.

  그런데 교정지를 몇 번 보니까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쓰가루를 향해 떠나기 시작한 주인공 일행에, 귀여운 그림에, 상쾌한 이야기에 번역자인 내가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작품이 '볼매(볼수록 매력 있음)'라 그런 것인지, 친구가 적다 보니까 내가 교정지 짜응에 정이 든 것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째 독자보다 번역자인 내가 뒷권을 더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판매량은 우려했던 대로 좋은 편은 아니었고, 1년에 한 권 페이스로 정발되게 되었다. 참다 못한 난 작년 여름에 간사이 여행을 가서 완결편인 3권을 구입했고, 데보네어 일행이 쓰가루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북스에서 3권의 번역 의뢰가 들어왔다. 
  
  의기충천해서 번역을 시작했지만, 원래 형편없는 번역 실력이 갑자기 개선될 리는 만무했고 아직도 내가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느낀 것을 번역으로 잘 전달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난 내가 좋은 번역자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내 손에 걸려서 희생되는 만화에 대한 미안함을 마음 한구석에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데보네어 드라이브'에 대해선 미안한 감정보다 고마운 감정이 앞선다. 해파리 에치젠, 게이 모모야마, 도둑 마리, 노망 보스... 여러분의 여행에 동행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망글의 끄트머리를 빌어 특히 초반에 엄청나게 도움을 주신 L 편집자 님(대표적으로 '햇살 케어'도 이분의 작품)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데보네어 드라이브' 3 나왔습니다! 번역작품들


흑흑, 2년 전에 1권이 나왔던 '데보네어 드라이브'가 3권으로 완결되었습니다.
주말에 한양툰크 가서 진열된 걸 눈으로 봤는데 감개무량하네요.

이 작품에 대한 뒷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후기에서ㅎㅎ.

요새 읽은 만화들 65 만화관련

폴리나/ 바스티앙 비베스/ 미메시스
은근히 많이 소개되는 바스티앙 비베스의 장편입니다. 무용을 소재로 자신의 만화 인생을 풀어낸 작품인데 벌써부터 이런 거 그려도 되나? 하는 비뚤어진 의문이 잠깐 들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만화 인생 회고 만화(?)가 '극화표류' '만화의 길' 요런 거다 보니까 엄청 거장들만 그리는 만화란 선입견이 있었거든요. 그 점을 제외하면 걸리는 데가 별로 없는 만화였으니 바스티앙 비베스를 좋아하신다면 보셔도 될 듯합니다. 전 바스티앙 비베스를 좋아하진 않지만 미메시스라서 구입했지요...
가지-수트케이스의 철새/ 쿠로다 이오/ 세미콜론
올해 들어서 본 일본 만화 중에선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싱거워서 재미있는 만화라고 하면 대충 이 작품의 성격이 이해가 되실 듯. 화끈한 만화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하기는 좀 그렇지만 릴랙스한 곳에서 독서하시는 분이라면 마음에 드실 것 같네요.
SARU/ 이가라시 다이스케/ 애니북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만화라서 구입했는데 이번엔 좀 실망했습니다. 이사카 코타로와의 콜라보레이션 기획이라고 들었는데 묘하게 이런 기획물(?) 중에서 재미있게 본 만화는 거의 없는 듯. 그냥 작가에게 맡기는 게 짱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림은 여전히 끝내줍니다. '이제부터 넌 만화가 아니라 화집이야'라고 최면을 걸고 있네요.
완벽하지 않아/ 에이드리언 토미네/ 세미콜론
찌질한 주인공을 수없이 봐온 저지만 이 만화의 주인공인 벤처럼 찌질한 주인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찌질해진 것에는 나름 맥락과 이유가 있었겠고, 또 그 찌질함의 대가로 거의 모든 것을 잃었기에 안쓰럽긴 하네요. 아시안 커뮤니티 풍경도 나오는데 저런 데서 살면 숨막히겠다 싶더군요. 암튼 재미있게 보긴 했습니다. 벤, 힘내. 이 새끼야.
누에의 요새/ 후쿠시마 사토시/ 서울문화사
번역자인 김동욱 님께서 친히 하사해주신 후쿠시마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 재미있게 봤습니다. '기동여단 팔복신'을 보고 좀 정신세계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단편들이 심하게 병들어 있네요. 무슨 나폴리탄 괴담 같은 단편도 있고... 몇 번 더 보면 제 순수하고 건강한 정신이 병들 것 같아서 봉인을 해야 할 듯. 왠지 멘붕을 하고 싶으실 때 읽으시면 될 듯합니다.
창공/ 다니구치 지로/ 이숲
'열네 살'과 비슷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오시마 유미코의 '아키히코는 이렇게 말했다'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요시모토 요시토모의 단편 하나도 생각나고요. 사고 뒤에 한 사람 몸에 두 사람의 영혼이 들어간다는 흔한 설정의 이야기인데 제가 다니구치 지로 빠라서 그런지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소품이니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보시면 좋을 듯.

교보문고에서 주문한 만화가 전부 들어왔다는 전화가 걸려왔네요.
기쁜 소식이기는 한데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 겁이 납니다, 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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