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브들을 위한 추천 만화(전편)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스노브 여러분. 지난 번에 추천 드린 5편의 만화를 잘 울궈먹으셨는지 궁금하군요. 아,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고요? 그야 당연하지요. 고상하기 짝이 없는 여러분이 어찌 품격 없는 만화 따위를 읽었으랴, 주위 사람들은 그런 생각으로 여러분에게 만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셔선 안 됩니다. 진정한 스노브가 되려면 1년에 한 두 번 어쩌다 지나가는 사소한 화제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드는 순간포착능력과 과단성을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평소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만 하겠지요. 여러분의 스노브질 준비에 도움이 되고자 다섯 편의 만화를 더 추천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으로 여러분의 스노브 안테나에 만화 이야기가 걸릴 확률이 2배로 상승하게 되겠네요.
6. 재미난 집 (엘리슨 벡델, 글논그림밭)요즘 세상에 성적소수자와 페미니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스노브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게이 or 레즈비언임을 당당하게 커밍아웃하는 셀러브리티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페미니즘도 쉰 떡밥이라고 하기엔 아직 효용성이 남아있는 편이지요. 엘리슨 벡델의 '재미난 집'은 여러분이 평소에 성적소수자와 페미니즘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인증시켜주는 아주 좋은 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나가면서 언급되는 페미니즘 고전에 대해서 아는 체 하는 것이 이 책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겠습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그거 다 읽어봤냐고 의심에 가득찬 눈초리와 함께 질문을 던지면 "그런 걸 물어보다니, 천박한 사람 같으니"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은근한 경멸의 미소를 지어주시면 됩니다. 물론 상대방에겐 그 미소가 썩소로 보이겠지요.
7. 샌드맨 (닐 게이먼 외, 시공사)'~맨'이 들어가는 만화는 유치해서 스노브인 여러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오산! '~맨'이 들어간 만화로도 여러분은 스노브 드립을 칠 수 있습니다. 소설과 만화, 양쪽에서 모두 활약하는 닐 게이먼의 '샌드맨' 시리즈는 이에 딱 맞는 만화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개나 소나 대산초어나 읽는다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연관을 지은 스노브 드립을 추천드립니다. 셰익스피어가 전면에 드러나있다고 셰익스피어와 연관을 지어서 이야기하는 건 쿨하지 않죠. 보르헤스의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언급하면서 닐 게이먼이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은 셰익스피어를 '현대'의 '만화'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신다면 대화 상대방이 닐 게이먼의 지인이 아닌 이상에야 뭐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만약 상대방이 진짜 닐 게이먼의 지인이어서 "닐에게 물어봤는데 아니라던데?"라고 반박한다면, "비평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다"라고 발뺌하시면 되겠습니다.
8. 너 좋아한 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 열린책들)고전을 좋아하는 것이야 스노브의 기본 소양이지만, 스노브가 아니더라도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니 그들과 차별점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인디 쪽에도 관심을 기울이든지 아니면 관심이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아마추어들을 진심으로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평적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관심을 두고는 있지만 평가는 가혹하게 하는" 컨셉을 태연하게 소화해야 합니다. 체스터 브라운은 여러분들에게 매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는 만화를 여러 편 발표했는데, 그 중에서 '너 좋아한 적 없어'의 평가가 가장 높으므로 이 만화를 인용하는 게 좋습니다. 한국 인디 만화에 대한 화제가 나왔을 때, 체스터 브라운의 영향을 짙게 받은 몇몇 작가들을 언급하면서 신랄한 평가를 내린다면 OK. 상대방의 분통 터지는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군요.
9. 쥐 (아트 스피글먼, 아름드리)1992년에 퓰리쳐 상을 수상한 아트 스피글먼의 '쥐'는 여러분에게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리는 만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 이 만화를 가지고 스노브질을 할 때엔 다른 작품과 달리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만화를 가지고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만화는 만화에 가혹한 일반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을 정도로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예술만화의 대표격으로 항상 인용되어 왔기 때문에 아는 척을 해봤자 거의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만화로 스노브질을 하신다면 드러내놓고 작품을 찬양하기 보다는 "당연히 그 정도는 다 읽지 않았어?"란 식으로 쿨하게 살짝 읽었다는 뉘앙스만 풍기시는 것이 최선입니다. 혹 대화 도중에 상대방이 안 읽었다고 실토한다면 쿨하게 화제를 만화가 아닌 다른 것으로 전환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치 '쥐'도 안 읽은 무지한 사람은 여러분과 만화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다는 듯이 말이죠.
10. 왓치맨 (알란 무어 & 데이브 기븐스, 시공사)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함께 성인을 위한 히어로 만화의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왓치맨'은, 이후 성인들을 위한 배트맨 만화가 쏟아져 나와 다소 빛바랜 듯이 보이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여전히 높은 평가를 유지하고 있는 만화입니다. 영화화된 지 얼마 안 된 것을 봐도 알 수 있지요. '왓치맨'을 스노브질에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영화판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한국 박스 오피스를 강타했던 영화니 만큼, 영화를 본 사람이 원작을 본 사람의 수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원작을 높이고 영화를 까는 것이 효과적이겠지요. 영화에서 칭찬할 만한 부분은 밥 딜런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 '이 흘러나오는 오프닝 정도 뿐이고 나머지는 원작 훼손이라고 소리 높여 강변하시기를 추천합니다.
그럼 여러분 즐스놉!
전편이 망한 글 치고는 반응이 좋았기에 이렇게 완결편을 쓰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좀 재미가 덜하네요^^. 원래 구상했던 것과는 작품 면면이 좀 달라졌는데 글쓰기의 편의성을 위해서 작품을 변경했습니다. 컨셉은 지난 글과 마찬가지로 1. 지적인 만화 추천, 2. 만화를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아냥입니다. 지난 번에 덧글을 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도 있던데 그냥 웃어 넘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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