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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츠카와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데츠카에게 있어서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존재는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모든 장면이 아름다운 만화 '붓다'에서 데바닷타와 붓다의 첫만남장면을 기억해보자. 데바닷타는 동굴에 있는 붓다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약육강식이야 말로 진리'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붓다의 반응은 단지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응? 어디에서 많이 본 장면같은데... 맞다. '죄와 벌'이었지! '죄와 벌' 4부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와 그녀의 가족의 미래에 대해서 신랄하게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소냐의 반응은 어땠는가. 단지 '아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두개의 대화에서 아니다라고만 하던 쪽의 감정이 폭발한다. 그들은 동시에 외친다.

"그것은 브라우만의 뜻이 아니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리 없어요!"


다른 만화를 보자. 이번엔 '불새-망향편'을 펼쳐서 아데나17의 이야기를 볼까? 평화로운 유토피아였던 아데나17은 단 한사람의 이방인에 의해 퇴폐해서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응? 이것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맞다. '우스운 사람의 꿈'이었지. 여기에서도 유토피아가 화자 한 사람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블랙잭'의 키리코도 마찬가지다. 그는 블랙잭의 그림자(분신)적인 캐릭터다. 이것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전매특허아닌가.

이처럼 데츠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야코'의 후기에서 '이 작품을 그릴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이 그리려 했었다.'라는 코멘트나 만화화한 '죄와 벌'에서 '(원작을)수십번도 넘게 읽었다.'라는 말을 보면 꽤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좋아했으면서도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중요요소 중 한가지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만화화한 '죄와 벌'에 잘 드러난다.

우선 대단히 무리없이 만화화했다는 점은 이 만화의 미덕이다. 아동들에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두가지 요소인 '끌리꾸샤(부인성 히스테리)'와 '유로지비(성자바보)'를 거의 삭제하다시피하고 중요한 사건들을 거의 놓치지 않으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일관되게 이끌어간다. 복잡했던 인물구조나 사건들은 간략하게 정돈되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죄외 벌'의 입문서로 쓰면 정말 안성맞춤일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끌리꾸샤'적 캐릭터인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원작에서처럼 발작적 광기로 폭주하지 않고 그냥 히스테리적 성격에만 머무른다. '죄와 벌'을 괴기스럽게까지 만드는 그녀의 원작에서의 모습을 본다면 오히려 이쪽이 받아들이기 쉬울것이다. 그리고 '유로지비'인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동생인 리자베따는 아예 등장하지조차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점은 상당히 아쉬운데 리자베따의 살해부터 라스콜리니코프의 절망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삭제된것은 조금 안타깝다.

그외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 묘사는 매우 훌륭하다. 다른 캐릭터의 심리 묘사는 일절하지 않으면서 심리 묘사의 포커스를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집중시킨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 범죄를 저지른후 증거를 인멸하려 할 때, 포르피리와 대면할때 등에서 데츠카는 약간 과장된 듯 하면서 극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를 묘사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원작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바로 이것이 데츠카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악마성이다. 이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악마적 초인을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에서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러기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악마성을 모두 상실한 철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허무의 극에 달하여 두냐를 손에 넣지 못하자 자살하는 이 악마적 초인은 만화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을 추종하는 학생운동가의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결국 선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데츠카 오사무의 인간관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실제로 데츠카가 그리는 악인들은 어리석거나 욕심이 많을 뿐이다. 아예 자유를 위하여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는 악인은 마쿠베 로쿠로 이외엔 없다. 또한 그는 마쿠베 로쿠로와 같은 캐릭터를 두번 다시 그리지 않았다(스타시스템제외).

악마적 초인을 제거한 '죄와 벌'이다보니 라스콜리니코프의 복잡한 심리는 매우 간략화된다. 이것은 커다란 단점일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것이 만화'죄와 벌'의 장점일것이다. 결말또한 시베리아 유형에가는 원작과는 달리 자수하러 가는 도중에 끝냄으로써 여운을 남기고 있다. 콘스탄틴 모출스끼는 그의 '도스토예프스키론'에서 이 시베리아 유형에 대한 에필로그를 자기기만이라 해석했을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았으니 이것을 제외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을것이다.

'죄와 벌'을 읽든 읽지 않았든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by 블랙잭 | 2005/03/05 23:42 | 만화관련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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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나름대로 at 2005/03/06 13:43
박노자 씨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신랄한 평을 해놓았던데...
아직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고
(어릴때 즐겨봤던 세계문학 완역본에 있었지만 선뜻 손이 안가더군요.)
뭔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별로 아는게 없어서 좀더 접해봐야 할듯 합니다.

개인적으론 원작에 100%충실한 작품같은건 하등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것뿐 아니라 모든 것에서)
데츠카 선생의 선택도 괜찮게 보이네요.
(맘에 안들면 원작만 보면 되니...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Commented by 블랙잭 at 2005/03/06 14:59
문학에 있어서는 탁월한 존재였지만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싫어하는 작가 수위를 다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좀 심각한 슬라브 선민주의랄까 그런게 있었죠. 러시아 정교가 최고의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요.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미워할 수 없죠.

그리고 원래 이런 말도 있잖아요. 번역은 마누라같다구요.
예쁠수록 배신을 잘한다고... 모든 해석은 아마 그런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도 데츠카 선생님은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으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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