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3월 26일
졸역 쓰게 요시하루 초기작 해설(2)
레종 데트르를 얻기위한 예술가의 몸부림 '무능인'
졸역 쓰게 요시하루 초기작 해설(1)
하지만 순풍에 돛단듯한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만화가가 되고 2년이 지나자 대본만화에 희미하지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자는 큰 잡지사의 의뢰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소년지는 스토리에 참견을 했다. 어떨 때엔 타이틀을 미리 정해놓고 그에 따라 스토리를 만들도록 강요했다. 프로만화가를 지원하는 젊은이들에게 출판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저자는 그때 현장에서 도망쳤다. 작가로서의 의식이 높아서가 아니다. 단지 타자와의 흥정이 싫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항상 의사소통의 문제가 부상한다. 그 결과로 다시 대본만화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런 작가는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많은 만화가들이 대본만화를 디딤대로 삼아 큰 소년지에 등장하는 것을 꿈꾸기 때문이다. 전에 저자는 어딘가에서 말한 적이 있다. 유명한 만화가가 되고 싶다거나 큰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구가 전혀 없었다, 나에겐 수입이 신경쓰일 뿐이었다라고 말이다. 저자에게는 사회적 명예라든가 상승지향이라든가 하는 개념이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십수년전의 일이다. 어느 광고대리점에서 모 메이커의 TV광고에 출연하지 않겠느냐고 저자에게 타진했다. 출연료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구라면 집 한 채 지을만한 금액을 제시했었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낡은 단지 생활에 여유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기에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그렇게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촬영때문에 스탭들과 며칠간 지내는 것을 참을 수 없고. 그거하고 내가 광고에 나간다는 의미도 모르겠고 가장 큰 건 부끄럽고..."
저자는 수입보다 인간관계의 성가심을 피하고 자기 나름대로 편하게 사는 것을 택했다. 그러기에 저항과 거절과는 완전 다르다. 그런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이 페이스 라이프 스타일을 어떤 특별한 감성이라던가 미의식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주변에 저자의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대본 만화로 돌아가보자. 1956년에 오사카에서 '그림자(影)'라는 A5판 단편지가 등장했다. 이듬해 57년에는 '거리(街)'가 뒤를 이었다. '그림자'나 '거리'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대본업계에 활기를 선사했다. 전에 말한 대로 그때까지의 대본만화라는 것은 순전히 아동지향적이었지만 '그림자' '거리'는 독자의 연령을 대폭 끌어올렸다. 하드보일드, 액션, 추리물이 다수를 점했다. 이른바 극화의 등장이다. 영화적인 리얼한 그림과 다이나믹한 극성이 추구되었다. 그림선도 거칠고 경질의 직선이 다용되었다. 그것은 종래의 부드러운 곡선에 의하여 표현된 만화와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극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분명한 조류가 되었다. 각각의 검은 표지가 대본소의 책장을 점유하여 대본소의 분위기마저도 일변한 듯한 감이 있었다.
간사이의 극화의 흥성에 자극을 받아 도쿄의 구석에서도 동계통의 단편지가 이어졌다. 이 책에 수록된 '귀신 굴뚝' '어느 하룻밤' '복화술사' '이상한 편지'는 '그림자' '거리'의 영향을 받아 58년에 출판된 '미로'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미로'도 서스펜스를 가득 담은 단편지였지만 간사이의 그것과는 약간 취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간사이의 극화는 일본활극 액션을 우려먹은 황당무개한 것들이 잘 팔리던 것과 비교하여 '미로'를 시작으로한 도쿄의 그것들은 매우 얌전했다. 얌전했다기보단 데츠카 오사무식과 아동만화의 그림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저자의 작품은 어느 부분, 간사이계에 가까웠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저자에게는 타츠미 요시히로와 마쓰모토 마사히코의 그림이 신선하게 비쳤기 때문이리라. 타츠미 등의 사실적인 표현을 관찰한 것에 의해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리얼리즘을 얻었다. '귀신 굴뚝'에서 시작된 작품군은 그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비슷한 때에 저자는 에도가와 란포가 편집한 '보석(寶石)'지상에 다시 실린 타니자키 쥰이치로, 하기와라 사쿠타로, 하야마 요시키, 유메노 히사사쿠 등의 소설을 애독하고 있었다. 다른 극화군과 다른 성질의 서스펜스 드라마는 문학적 영향에 의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심리의 어둠을 표현한 소설군이 저자의 자질과 감성에 잘 겹쳐진 것일까. 그리고 이 즈음에 리얼리즘을 전면으로 내세운 극화적 표현이 저자에게 가장 맞았다고 자각했었을지도 모른다.
'귀신 굴뚝'에서 '복화술사'에 걸친 작품들은 자폐적이고 고독한 저자의 모습을 말해준다. 작가의 고유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대본 만화에 있어선 희소한 예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쓰게의 작품군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주목받거나 하진 않았다.
극화의 흥성에 의해 대본소에 드나드는 연령층은 확대되었다. 만화에 한정지어 말하면 초중학생중심이었던 것이 중학생 이상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간사이극화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끌었던 것은 시라토 산페이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59년부터 간행된 '닌자무예장'은 대본만화계에 닌자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극화식과 시라토식, 이것이 60년 전후 대본만화의 2대 조류였다. 저자는 이번엔 시라토식을 받아들여서 작품을 그렸다. 그 덕분인지 당시의 만화업계에 있어서 쓰게 요시하루의 이름은 장사에 도움이 되는 작가로서 인식되었다.
본서에 수록된 '맹인'과 '구멍'은 시라토 산페이의 단편을 권두에 실은 '인풍'에 실렸다. '맹인'은 6편까지 그려진 '무사시 비화'시리즈 중 하나다. '맹인'도 '구멍'도 1960년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복화술사'를 포함한 22작의 단편이 "난작"되었다. 저자의 회상에 의하면 그저 생활비를 벌기 위해였던것 같다. 이 해는 반안보 데모가 전국에서 펼쳐졌다. 거리의 온갖 곳에서 대중 데모를 볼 수 있었지만 저자는 그런 소동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어떠한 시끄러운 사회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부로 하강하고만 있었을 지도 모른다.
60년 안보 전해에 '소년 매거진' 소년 선데이'라고 하는 주간 소년지가 등장함에 따라 만화계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 현저한 예는 대본소의 쇠퇴였다. 60년을 기점으로 골목에 존재했던 대본소는 한집 한집 자취를 감췄다. 초중학생 소년들은 주간지로 전향했지만 대본소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층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이나 영세기업에 취직한 젊은이들이었다.
졸역 쓰게 요시하루 초기작 해설(3)-完
졸역 쓰게 요시하루 초기작 해설(1)
하지만 순풍에 돛단듯한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만화가가 되고 2년이 지나자 대본만화에 희미하지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자는 큰 잡지사의 의뢰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소년지는 스토리에 참견을 했다. 어떨 때엔 타이틀을 미리 정해놓고 그에 따라 스토리를 만들도록 강요했다. 프로만화가를 지원하는 젊은이들에게 출판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저자는 그때 현장에서 도망쳤다. 작가로서의 의식이 높아서가 아니다. 단지 타자와의 흥정이 싫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항상 의사소통의 문제가 부상한다. 그 결과로 다시 대본만화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런 작가는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많은 만화가들이 대본만화를 디딤대로 삼아 큰 소년지에 등장하는 것을 꿈꾸기 때문이다. 전에 저자는 어딘가에서 말한 적이 있다. 유명한 만화가가 되고 싶다거나 큰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구가 전혀 없었다, 나에겐 수입이 신경쓰일 뿐이었다라고 말이다. 저자에게는 사회적 명예라든가 상승지향이라든가 하는 개념이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십수년전의 일이다. 어느 광고대리점에서 모 메이커의 TV광고에 출연하지 않겠느냐고 저자에게 타진했다. 출연료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구라면 집 한 채 지을만한 금액을 제시했었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낡은 단지 생활에 여유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기에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그렇게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촬영때문에 스탭들과 며칠간 지내는 것을 참을 수 없고. 그거하고 내가 광고에 나간다는 의미도 모르겠고 가장 큰 건 부끄럽고..."
저자는 수입보다 인간관계의 성가심을 피하고 자기 나름대로 편하게 사는 것을 택했다. 그러기에 저항과 거절과는 완전 다르다. 그런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이 페이스 라이프 스타일을 어떤 특별한 감성이라던가 미의식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주변에 저자의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대본 만화로 돌아가보자. 1956년에 오사카에서 '그림자(影)'라는 A5판 단편지가 등장했다. 이듬해 57년에는 '거리(街)'가 뒤를 이었다. '그림자'나 '거리'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대본업계에 활기를 선사했다. 전에 말한 대로 그때까지의 대본만화라는 것은 순전히 아동지향적이었지만 '그림자' '거리'는 독자의 연령을 대폭 끌어올렸다. 하드보일드, 액션, 추리물이 다수를 점했다. 이른바 극화의 등장이다. 영화적인 리얼한 그림과 다이나믹한 극성이 추구되었다. 그림선도 거칠고 경질의 직선이 다용되었다. 그것은 종래의 부드러운 곡선에 의하여 표현된 만화와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극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분명한 조류가 되었다. 각각의 검은 표지가 대본소의 책장을 점유하여 대본소의 분위기마저도 일변한 듯한 감이 있었다.
간사이의 극화의 흥성에 자극을 받아 도쿄의 구석에서도 동계통의 단편지가 이어졌다. 이 책에 수록된 '귀신 굴뚝' '어느 하룻밤' '복화술사' '이상한 편지'는 '그림자' '거리'의 영향을 받아 58년에 출판된 '미로'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미로'도 서스펜스를 가득 담은 단편지였지만 간사이의 그것과는 약간 취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간사이의 극화는 일본활극 액션을 우려먹은 황당무개한 것들이 잘 팔리던 것과 비교하여 '미로'를 시작으로한 도쿄의 그것들은 매우 얌전했다. 얌전했다기보단 데츠카 오사무식과 아동만화의 그림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저자의 작품은 어느 부분, 간사이계에 가까웠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저자에게는 타츠미 요시히로와 마쓰모토 마사히코의 그림이 신선하게 비쳤기 때문이리라. 타츠미 등의 사실적인 표현을 관찰한 것에 의해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리얼리즘을 얻었다. '귀신 굴뚝'에서 시작된 작품군은 그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비슷한 때에 저자는 에도가와 란포가 편집한 '보석(寶石)'지상에 다시 실린 타니자키 쥰이치로, 하기와라 사쿠타로, 하야마 요시키, 유메노 히사사쿠 등의 소설을 애독하고 있었다. 다른 극화군과 다른 성질의 서스펜스 드라마는 문학적 영향에 의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심리의 어둠을 표현한 소설군이 저자의 자질과 감성에 잘 겹쳐진 것일까. 그리고 이 즈음에 리얼리즘을 전면으로 내세운 극화적 표현이 저자에게 가장 맞았다고 자각했었을지도 모른다.
'귀신 굴뚝'에서 '복화술사'에 걸친 작품들은 자폐적이고 고독한 저자의 모습을 말해준다. 작가의 고유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대본 만화에 있어선 희소한 예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쓰게의 작품군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주목받거나 하진 않았다.
극화의 흥성에 의해 대본소에 드나드는 연령층은 확대되었다. 만화에 한정지어 말하면 초중학생중심이었던 것이 중학생 이상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간사이극화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끌었던 것은 시라토 산페이의 작품들이었다. 특히 59년부터 간행된 '닌자무예장'은 대본만화계에 닌자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극화식과 시라토식, 이것이 60년 전후 대본만화의 2대 조류였다. 저자는 이번엔 시라토식을 받아들여서 작품을 그렸다. 그 덕분인지 당시의 만화업계에 있어서 쓰게 요시하루의 이름은 장사에 도움이 되는 작가로서 인식되었다.
본서에 수록된 '맹인'과 '구멍'은 시라토 산페이의 단편을 권두에 실은 '인풍'에 실렸다. '맹인'은 6편까지 그려진 '무사시 비화'시리즈 중 하나다. '맹인'도 '구멍'도 1960년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복화술사'를 포함한 22작의 단편이 "난작"되었다. 저자의 회상에 의하면 그저 생활비를 벌기 위해였던것 같다. 이 해는 반안보 데모가 전국에서 펼쳐졌다. 거리의 온갖 곳에서 대중 데모를 볼 수 있었지만 저자는 그런 소동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어떠한 시끄러운 사회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부로 하강하고만 있었을 지도 모른다.
60년 안보 전해에 '소년 매거진' 소년 선데이'라고 하는 주간 소년지가 등장함에 따라 만화계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 현저한 예는 대본소의 쇠퇴였다. 60년을 기점으로 골목에 존재했던 대본소는 한집 한집 자취를 감췄다. 초중학생 소년들은 주간지로 전향했지만 대본소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층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이나 영세기업에 취직한 젊은이들이었다.
졸역 쓰게 요시하루 초기작 해설(3)-完
# by | 2005/03/26 21:37 | 만화관련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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