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loos | Log-in


소년과 바다, 마쯔모토와 쓰게, '꽃'과 '바다로'

졸역 쓰게 요시하루의 '바다로'(上)
졸역 마쯔모토 타이요의 '꽃'(1)

소년에게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다. 소년에게 있어서 바다는 미지의 세계이며 현실과는 상반되는 존재다. 또한 바다는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카뮈의 소년시절의 알제의 바다와 태양에 대한 애정이 어떻게 그의 작품속에서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했는지를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다. 소년과 바다, 이것은 정말로 매혹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소년은 동경하는 바다에서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리얼리스트 쓰게의 '바다로'와 유머의 전도사인 마쯔모토의 작품 '꽃', 이 두 작품을 통해 이 매혹적인 소재를 그들이 어떻게 다루었고 그 시선이 어떻게 다른지를 돌아보자.

쓰게의 '바다로'에서 주인공 소년은 구차하지만 도망치는게 허락되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바다를 향한다. 그러나 그는 선원이 되겠다는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고 그에게 주어진 것은 바다가 아니라 감방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옥에 사는 소녀와 함께 바다로 가고자 하나 소녀는 그것을 거부하고 선옥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 돌아간다. 쓰게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현실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바다로'는 '늪'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소년에게 바다는 허락받지 못했고 소녀는 있던 곳을 벗어나지 못하며 바다에 갈 수 있는 유일한 허락된 방법은 죽음뿐이다.-결국 죽은 소녀의 아버지만 바다로 흘러 갈 수 있었다.- 말그대로 도망치는건 허락되지 않는다.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결국 동경에 그칠 수 밖에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소년을 절망에 몰아넣는다. 닿고 싶지만 닿지 않는다는 것이 때로는 닿을 것이 전혀 없는 것보다 절망적일 수 있다. 소년은 바다에서 삶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절망의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만다.

이에 비하여 마쯔모토의 '꽃'은 '바다로'에 대한 나름의 대답인 것처럼 느껴진다. 유리는 틀어박혀서 가면을 만들다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제사가면을 만들고 바다로 떠난다. 동생인 츠바키는 형의 가면을 흉내내지만 형의 가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실망한다. 유리가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그들의 역할은 뒤바뀐다. 형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스미레와 기쿠(삶과 죽음), 그리고 그 식에 따르는 그들의 가면이 서로 교차한다. 교차하면서 그들은 교묘히 혼합된다. 삶과 죽음, 폐쇄와 개방, 현실과 비현실이 서로 얽히면서 하나의 모순된 그러나 정확하게 본질적인 세계를 구성해낸다. 모순이 조화된 것이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다. 이것이 마쯔모토의 세계관이다. 그러기에 '피에선 철의 맛이 날수 있었던'것이다. 모순이 조화되어 있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웃는것이다. 마쯔모토가 유머의 전도사란 것은 이런 의미다. 이 '꽃'의 방점은 소년이 바다에 도착하면서 찍힌다.

그런데 '꽃'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유리가 바다에 뛰어들지 않고 도착하는 데서 끝난다는데 있다. 유리는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다. 아니 뛰어들지 못한다. 왜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마쯔모토도 쓰게의 리얼리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 '핑퐁'에서 호시노 유타카는 파푸아 뉴기니를 향해 헤엄쳐나가지만 결국 물가도 벗어나지 못하고 가라앉는다. 사쿠마 마나부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호시노는 결국 그 물장구를 통해서 현실도피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현실에선 도피가 불가능하다. 마쯔모토에게도 바다는 닿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마쯔모토의 작품들이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아마도 이런 리얼리즘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쯔모토의 '꽃'에서 유리는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모래를 만지작 거리면서 웃음짓는다. 바다에 들어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해변에서 만족한다. '바다로'의 소년에게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무 의미도 없는 자기만족을 가지고 있는 유리는 소년처럼 바다에 닿을 수 없지만 소년과 달리 절망이 아닌 웃음을 얻었다. 이런 쓰게에 대한 마쯔모토의 대답은 기만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 기만에 의해서 삶을 사랑하는 게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삶의 원래의 모습이 쓰게가 말하듯 고독과 부조리라고 해도 우린 마쯔모토가 보여주듯이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by 블랙잭 | 2005/07/30 01:01 | 만화관련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bjkun.egloos.com/tb/159304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yasujiro at 2005/07/30 14:45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작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츠모토쪽이 츠게보다는 소통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 느껴지더군요. 마츠모토도 그렇게 낙천적인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이랄까 하는것이 모순을 대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연결되는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블랙잭 at 2005/07/31 03:49
yasujiro// 마쯔모토는 '핑퐁'의 스마일같은 인간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스마일은 세계를 두려워하면서도 가슴 한편으로는 동경하지요. 마찬가지로 마쯔모토도 폐쇄적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접촉을 갈망하는 것 같습니다. 이 어정쩡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기에 그에겐 유머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밖에 없었겠지요. 제멋대로 공식을 만들어보면 쓰게(리얼리즘)와 모치즈키(낭만주의)의 가운데에 존재하는게 마쯔모토가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핑퐁'의 다른 한명의 주인공 호시노 유타카는 모치즈키의 '물장구치는 금붕어'의 하나이 카오루와 너무나 많은 유사점을 가집니다. '핑퐁'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볼까 생각중입니다:D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