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8월 11일
권태를 몰아내고 싶지만 의미있는 일이 없다 '그린힐'

그린힐의 주인공 세키구치는 권태의 늪에 빠져 있다가 우연히 미도리란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해 그녀에게 대쉬하기 위하여 오토바이 서클 그린힐에 가입하게 되고 오토바이 면허를 따게 된다. 그 오토바이 교습소에서 만난 요코다, 오토바이 서클의 리더 오카, 멤버 이토, 시노비다와 여러 가지 무의미한 일을 벌이게 되고 요코다와 연인사이가 된다. 결말에서 잠깐 담배를 뽑으러간 세키구치는 돌아오는 길에 벤치에 누워서 권태를 극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중얼거린다.
전작인 ‘이나중 탁구부’, ‘크레이지 군단’과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철저히 무의미하다. 모든 일은 그냥 재미삼아서 할 뿐이며 시간 때우기에 지나지 않는다. 요코다가 힘든 일이라며 세키구치의 손을 이끌고 하던 아르바이트는 고작 팬더 인형의 눈 붙이기고 그나마 세키구치는 그것이 따분해서 때려 치고 만다. 마지막에 벤치에 누워서 중얼거리는 대사-귀찮음을 극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도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단순한 타성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재미다. 생산적이고 고통이 따르는 일도, 이나중 탁구부에서 다나카의 팬티 벗기기도 그것이 결국 무의미하다는 데선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권태의 가능성을 항상 포함하고 있다. 뭘 해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남는 것은 권태뿐이고. 결과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무의미하지만 그것이 그나마 그 권태를 해소시켜 줄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모든 행위의 의미는 권태를 해소시켜 줄 수 있는가에 달리게 된다. 서글프면서도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래서 후루야 미노루의 개그만화에서 주인공들은 끝없이 장난만을 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세키구치의 독백은 되짚어보면 재미있다. 그는 귀찮음을 극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중얼거리지만 그는 그 대사를 벤치에 누워서 가장 귀찮아 보이는 자세를 취하고 뱉는다. 그도 사실은 훌륭하다는 것에 별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지 않을 것이다. 무의식적인 자기기만...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후루야 미노루 특유의 여성관이다. 부조리한 인간, 세계관에선 결국 찰나의 쾌락만 남게 되고 이것은 조금 일그러진 에로티시즘으로 발현된다. 근대 시민사회 이후로 인간의 관계는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계약은 결국 서로의 인간적인 교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간관계는 무의미한 계약을 통한 상호 기만의 모습으로 전락한다. 어차피 인간관계가 기만이라면 자신만의 쾌락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카프카 소설에서 여자가 그러하듯이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에서도 여성은 인격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성적대상-카프카 식으로는 관계대상-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 결과 작품 속 여성의 판단기준은 전적으로 성적 매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린힐의 요시에와 이나중 탁구부의 착한 여자애를 떠올려보자. 그런 착한 내면의 소유자라 해도 성적 매력이 없으면 그 외는 알바가 아닌 것이다.
현재까지는 이러한 시각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연재작인 ‘시가테라’는 앞으로 과연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기대가 된다. 그것이 어찌되었든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 by | 2005/08/11 20:05 | 만화관련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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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를 하시는 시간이 빨라졌어요. ^^
업뎃간격이 짧아진 건 알바가 끝나서입니다:D
아무튼 그린힐에서 가장 안정적인 캐릭터는 이토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전문기술과 가족이 있고, 오토바이에 대한 열정도 있(다고 말해지)구요. 이토의 가족은 성적 매력과 무관하게 이토에게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지요.
'그린힐'이 인간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하신다니 여쭙겠는데 그 관계가 인간적이던가요? 전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은 시간을 때울 방법을 알지 못해 어쩌다 모인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구심점없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죠. 실제로 만화를 다 읽고 난 뒤에는 '그린힐'이라는 단체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인상이 약하죠. 거의 오카의 삽질만이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절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속임수보다 위대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속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속아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만임을 뻔히 알면서 웃어넘겨 주는 것을 통해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다시 '그린힐'로 돌아오면 전 마지막 장면에서 한발짝 나아갔다기 보다는 다시 원래대로 ('그린힐'에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린힐'이 있든 없든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