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30일
카프카와 쓰게, 기묘한 죄와 벌
역시 글을 못쓰다보니 개판끄적거림이 나오는군요......
좌절OTL.. 그래도 쓰다보니 아까워서(사실은 포스팅거리가 없어서)
난 쓰게의 만화를 보면 카프카가 떠오른다. 둘 다 고독한 이방인이었고 그것이 창작의 원천이었다는 데서 공통점을 지니며 비슷한 모티프가 많이 사용된다. 쓰게가 카프카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받았다 해도 그것이 쓰게의 독창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쓰게의 작품은 카프카의 작품보다 어떤 면에선 더 나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카프카의 위대함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카프카의 작품들은 시의적절하며 또한 이방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이 둘에 대해 본격적으로 써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능력의 한계로 이번에는 카프카의 소설 '심판'을 중심으로 쓰게의 작품에서 카프카적 정서가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가볍게 고찰하고자 한다.
카프카의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역전된 죄와 벌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원래 벌은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며 지은 죄의 사회적 파장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소설 특히 ‘심판’에선 이것이 뒤집혀 있다. 우선 벌이 있고 나중에 죄가 있는 것이다. 요제프K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추적한다. 일단 그는 벌을 받고 그 벌에 해당하는 죄를 찾으려 버둥댄다. 그러나 무엇이 죄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사실 그의 죄는 그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프란츠가 내뱉는 대사가 그것을 극명히 보여준다. ‘규범을 모른다고 말한 주제에 죄가 없다니’ 그리고 이 이방인의 숙명 때문에 요제프K는 죽음을 맞이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처벌이란 소외와 고독이다. 이방인은 규범을 모르기에 세계에서 소외된다. 이방인은 규범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동원하지만 사실 세계의 규범이란 건 보편타당하기보단 부조리하다. 그래서 이방인은 합리적이 될수록 세계에서 더욱 소외된다. 이 소외의 극단적 형태가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변한 벌레다.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과 위치 등의 사회적 함의로 존재한다는 부조리를 깨달아버렸기 때문에 벌레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이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이처럼 소외당한 인간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기에 결국 고독에 빠지게 된다.
즉 ‘심판’에서 요제프K는 이방인이며 그는 소외와 고독이라는 처벌을 먼저 받고 나서 죄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 기묘한 역전은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에도 드러난다.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에는 기묘한 죄의식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죄의식을 노골적으로 다룬 ‘여름의 추억’을 보면 주인공은 자신이 실제 뺑소니사건의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작 희생자의 팬티를 내렸다는 것만으로 죄를 추궁 당할까봐 전전긍긍한다. 또한 ‘무능한 사람’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무능함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죄책감에 가깝다. 특히 이 작품에서 소외는 경제적인 측면으로 나타나는데 주인공은 자신이 왜 가난한지를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가난하다. 그는 세계에서 소외받는 벌(경제적으로)로 가난해지며 그것을 타개하려고 해보지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무능은 원죄에 가깝다. 카프카 이방인들의 ‘규범을 모름’과 마찬가지로.
덕분에 주인공들은 기묘한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벌(고독과 소외 혹은 가난)은 있는데 죄는 모른다. 대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죄를 지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실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벌(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요제프K가 그러했듯이 어떻게든 스스로에게서 죄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카프카나 쓰게 모두 내향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래봤자 역시 찾을 수가 없다. 죄를 찾으려면 일단 규범을 알아야 하는데 쓰게의 주인공들 또한 이방인이므로 이 규범이란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결과 죄와 벌 양쪽 모두에게서 고통을 받게 된다.
이 샌드위치같은 상황은 쓰게의 작품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선 구조’로 형상화된다. '늪'은 이런 구조를 가장 명확하고 완벽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실제 쓰게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늪'은 이미지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면..)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배경으로 설정된 벗어날 수 없는 늪, 한시적으로 해방되지만 결국 다시 침강하고 마는 사물들, 죽음밖에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죽을 수 없기에 반복되는 고통을 참아야만 하는 인물들...... 고작 12페이지짜리 만화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나사식’도 마찬가지다. 이미 제목부터 끝장을 보겠다는 결심이 느껴지는데 보통 나사는 돌리면 같은 자리를 돌다가 밑으로 가라앉는다(박힌다). 이 작품에서 기차는 거꾸로 가서 원래의 마을로 돌아오며 앞 페이지에 의미 없이 있던 스패너는 뒤에 주인공의 팔을 조인다. 한시적 해방의 이미지가 결말에 나타나기는 하나 결국 그래봤자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성적인 쾌락을 통해 나선 구조에서 잠시 탈출하기는 하나 보트가 닿을 곳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결국 그 보트를 타고 주인공은 해수욕을 하러 바닷가에 갈 것이다.
이렇게 세계에 소외받다 지쳐버린 주인공들은 때때로 스스로 소외를 실행하기도 한다. ‘나팔버섯캐기’는 이런 경향(쓰게 최악의 마이너스 경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소년은 나팔버섯을 캐러갈 산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동경하지만(나팔버섯 있는 곳에만 비가 내리는 것은 소년의 동경이 만들어낸 가벼운 기적이라고 봐도 좋겠다) 할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것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소년의 심리적 반응은 굉장히 탁월하게 묘사되는데 차츰 세계에 대한 동경이 옅어지면서 그것이 공포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시계에 틀어박히게 되는데 이는 명백히 자폐를 암시하고 있다.(난 아직도 이 작품이 고작 8페이지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이러한 극단적 경향은 쓰게의 또 다른 중요 모티프인 ‘증발’로 나타나는데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옅어진다. 쓰게가 나름대로 유연해진 것을 이유로도 들 수 있겠지만 '겐센관 주인’에서 묘사되듯이 그런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쓰게는 도망보다 견디는 것을 택한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죽으려고 하나 죽지 못한다('별리’를 보라). 소외와 고독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후기의 경향은 다시 카프카와 이어지는데 이는 카프카 최고의 소설인 ‘城’과 연결지어 생각해야 하므로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으면 고찰해보기로 한다.(라지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D)-
결론적으로 카프카의 기묘한 죄와 벌의 역전 모티프는 쓰게의 작품에서도 역시 나타나며 이것이 발전하여 기묘한 구조 혹은 내용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이 둘은 저주받은 리얼리스트였기에 똑같은 방향을 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품은 여전히 사람들을 전율시킨다. 삶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 일상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고독하다는 것, 이 모든 진실을 그들은 가리지 않고 그대로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라면 그 작품들은 가장 예술의 사명에 충실한 작품들일 것이다.
좌절OTL.. 그래도 쓰다보니 아까워서(사실은 포스팅거리가 없어서)
난 쓰게의 만화를 보면 카프카가 떠오른다. 둘 다 고독한 이방인이었고 그것이 창작의 원천이었다는 데서 공통점을 지니며 비슷한 모티프가 많이 사용된다. 쓰게가 카프카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받았다 해도 그것이 쓰게의 독창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쓰게의 작품은 카프카의 작품보다 어떤 면에선 더 나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카프카의 위대함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카프카의 작품들은 시의적절하며 또한 이방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이 둘에 대해 본격적으로 써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능력의 한계로 이번에는 카프카의 소설 '심판'을 중심으로 쓰게의 작품에서 카프카적 정서가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가볍게 고찰하고자 한다.
카프카의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역전된 죄와 벌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원래 벌은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며 지은 죄의 사회적 파장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소설 특히 ‘심판’에선 이것이 뒤집혀 있다. 우선 벌이 있고 나중에 죄가 있는 것이다. 요제프K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추적한다. 일단 그는 벌을 받고 그 벌에 해당하는 죄를 찾으려 버둥댄다. 그러나 무엇이 죄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사실 그의 죄는 그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프란츠가 내뱉는 대사가 그것을 극명히 보여준다. ‘규범을 모른다고 말한 주제에 죄가 없다니’ 그리고 이 이방인의 숙명 때문에 요제프K는 죽음을 맞이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처벌이란 소외와 고독이다. 이방인은 규범을 모르기에 세계에서 소외된다. 이방인은 규범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동원하지만 사실 세계의 규범이란 건 보편타당하기보단 부조리하다. 그래서 이방인은 합리적이 될수록 세계에서 더욱 소외된다. 이 소외의 극단적 형태가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변한 벌레다.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과 위치 등의 사회적 함의로 존재한다는 부조리를 깨달아버렸기 때문에 벌레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이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이처럼 소외당한 인간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기에 결국 고독에 빠지게 된다.
즉 ‘심판’에서 요제프K는 이방인이며 그는 소외와 고독이라는 처벌을 먼저 받고 나서 죄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 기묘한 역전은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에도 드러난다.

짤방은 yasujiro님 포스팅에서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에는 기묘한 죄의식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죄의식을 노골적으로 다룬 ‘여름의 추억’을 보면 주인공은 자신이 실제 뺑소니사건의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작 희생자의 팬티를 내렸다는 것만으로 죄를 추궁 당할까봐 전전긍긍한다. 또한 ‘무능한 사람’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무능함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죄책감에 가깝다. 특히 이 작품에서 소외는 경제적인 측면으로 나타나는데 주인공은 자신이 왜 가난한지를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가난하다. 그는 세계에서 소외받는 벌(경제적으로)로 가난해지며 그것을 타개하려고 해보지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무능은 원죄에 가깝다. 카프카 이방인들의 ‘규범을 모름’과 마찬가지로.
덕분에 주인공들은 기묘한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벌(고독과 소외 혹은 가난)은 있는데 죄는 모른다. 대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죄를 지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실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벌(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요제프K가 그러했듯이 어떻게든 스스로에게서 죄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카프카나 쓰게 모두 내향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래봤자 역시 찾을 수가 없다. 죄를 찾으려면 일단 규범을 알아야 하는데 쓰게의 주인공들 또한 이방인이므로 이 규범이란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결과 죄와 벌 양쪽 모두에게서 고통을 받게 된다.
이 샌드위치같은 상황은 쓰게의 작품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선 구조’로 형상화된다. '늪'은 이런 구조를 가장 명확하고 완벽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실제 쓰게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늪'은 이미지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면..)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배경으로 설정된 벗어날 수 없는 늪, 한시적으로 해방되지만 결국 다시 침강하고 마는 사물들, 죽음밖에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죽을 수 없기에 반복되는 고통을 참아야만 하는 인물들...... 고작 12페이지짜리 만화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나사식’도 마찬가지다. 이미 제목부터 끝장을 보겠다는 결심이 느껴지는데 보통 나사는 돌리면 같은 자리를 돌다가 밑으로 가라앉는다(박힌다). 이 작품에서 기차는 거꾸로 가서 원래의 마을로 돌아오며 앞 페이지에 의미 없이 있던 스패너는 뒤에 주인공의 팔을 조인다. 한시적 해방의 이미지가 결말에 나타나기는 하나 결국 그래봤자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성적인 쾌락을 통해 나선 구조에서 잠시 탈출하기는 하나 보트가 닿을 곳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결국 그 보트를 타고 주인공은 해수욕을 하러 바닷가에 갈 것이다.
이렇게 세계에 소외받다 지쳐버린 주인공들은 때때로 스스로 소외를 실행하기도 한다. ‘나팔버섯캐기’는 이런 경향(쓰게 최악의 마이너스 경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소년은 나팔버섯을 캐러갈 산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동경하지만(나팔버섯 있는 곳에만 비가 내리는 것은 소년의 동경이 만들어낸 가벼운 기적이라고 봐도 좋겠다) 할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것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소년의 심리적 반응은 굉장히 탁월하게 묘사되는데 차츰 세계에 대한 동경이 옅어지면서 그것이 공포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시계에 틀어박히게 되는데 이는 명백히 자폐를 암시하고 있다.(난 아직도 이 작품이 고작 8페이지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이러한 극단적 경향은 쓰게의 또 다른 중요 모티프인 ‘증발’로 나타나는데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옅어진다. 쓰게가 나름대로 유연해진 것을 이유로도 들 수 있겠지만 '겐센관 주인’에서 묘사되듯이 그런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쓰게는 도망보다 견디는 것을 택한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죽으려고 하나 죽지 못한다('별리’를 보라). 소외와 고독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후기의 경향은 다시 카프카와 이어지는데 이는 카프카 최고의 소설인 ‘城’과 연결지어 생각해야 하므로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으면 고찰해보기로 한다.(라지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D)-
결론적으로 카프카의 기묘한 죄와 벌의 역전 모티프는 쓰게의 작품에서도 역시 나타나며 이것이 발전하여 기묘한 구조 혹은 내용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이 둘은 저주받은 리얼리스트였기에 똑같은 방향을 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품은 여전히 사람들을 전율시킨다. 삶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 일상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고독하다는 것, 이 모든 진실을 그들은 가리지 않고 그대로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라면 그 작품들은 가장 예술의 사명에 충실한 작품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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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5/12/30 01:15 | 만화관련 | 트랙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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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변신-프란츠 카프카"의 고찰에 대한 고찰
#1 나는 "변신"에 나온 벌레를 보면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적을 잡으면 적의 지혜를 흡수하기 위해 그 적을 먹는다는 한 식인부족의 이야기이다. 혹시나 그 벌레도 주인공인 그레고르를 잡아먹고, 그의 기억을 흡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레가 흡수한 기억 때문에 그 벌레는 자신이 그레고르라 믿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2 "변신"을 번역한 사람 중 한 사람......more
yasujiro// 그래서 저도 쓰게가 카프카보다 몇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카프카의 작품은 좌절되는 상황에 무게가 실리는 반면에 쓰게의 작품은 그 근원에 있는 좌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줍니다.
카프카와의 비교가 재미있게 읽혀졌습니다.
저는 요즘 후지타니의 こいするたなだ君 번역을 하고 있지요.
출판사에서는 연애소설이라고 해서 받아왔는데... 사변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문체가 미치게 하는군요.
3주 지났는데 이제 조금 글발이 붙는군요. 재미도 있고... 뭐랄까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만 한다면 곳곳의 무대를 찾아다녔던 기억. 그런 사랑에 대한 다의성을 생각해 보는 새해입니다.
하시는 번역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왠지 범상치않은 연애소설인듯 한데 출간되면 꼭 사봐야겠네요: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