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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로 봄을 그리다" 타카노 후미코

테즈카 오사무 상 수상후 미즈키 시게루와 함께


타카노 후미코(高野文子)는 1957년 11월 12일, 니이가타현 니이쯔시에서 태어났다. 하기오 모토를 동경해서 만화가가 될 꿈을 꾸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착실하게 간호부 수업을 받으면서 만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도쿄에 상경해서도 간호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만화를 그렸다. 정식으로 만화가 데뷔하기 이전엔 2년 정도 간호부로 일하기도 했다. 틈틈이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79년에 JUNE란 잡지에 단편 <절대 안전 면도칼>을 발표하면서 상업지에 데뷔. 이후 독특한 단편들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뉴 웨이브" 만화가로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녀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은 여성 만화가가 "작가"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테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가 발표되기 이전에도 소녀를 대상으로 한 만화잡지는 존재했으나 지금의 양상과는 달리 짧은 형식의 유머 만화가 대부분이었고 연재하는 작가들도 남자 작가가 주류였다. 테즈카가 <리본의 기사>를 통해 소녀를 대상으로 한 장편 연재 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심리묘사를 말칸 밖으로 꺼냄으로써 소녀 만화의 뼈대가 잡히게 되었다. 이렇게 초기엔 남성 만화가 주류를 차지하던 소녀 만화계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 둘씩 뛰어난 여성 작가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여성 독자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남성 작가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여성 만화가들이 속속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두리적인 소녀 만화의 위치 덕분에 그녀들은 남성 만화가들처럼 "작가"의 지위를 손에 넣지는 못했다. 변함없이 만화의 중심은 소년, 청년 만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증가 일로였던 소년, 청년 만화의 부수가 감소로 돌아섰고 이에 따라 남성 독자들이 소녀 만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녀 만화에 새로 관심을 기울인 남성 독자들은 하기오 모토, 다케미야 케이코등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뛰어난 스토리성과 아름다운 그림, 섬세한 심리 묘사로 대표되는 이런 만화군은 당시 만화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줘서 소녀 만화는 재평가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여성 만화가도 "작가"일 수 있다는 견해가 형성되었다. 이런 시대분위기를 타고 처음부터 여성 "작가"로서 타카노 후미코는 자신의 만화가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82년 그 동안 발표한 작품들을 작품집으로 발표(<절대 안전 면도칼>), 만화협회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초기작은 하야시 세이이치를 연상케하는 면이 있는데 아름다움의 이면에 감추어진 죽음에 대한 불안, 폭력에 대한 공포를 독특한 필치로 묘사하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탕탕하고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절대 안전 면도칼>수록, 1980년작)>를 보면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져 있고 폭력이 행사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앙증맞게 그려진 오무라이스 위에 뿌려진 케첩은 명백히 피를 상징하고 있다. 이는 같이 하야시 세이이치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안자이 미즈마루하고도 차별되는 면인데, 안자이가 <청의 시대>에서 하야시 세이이치의 그림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이는데 비하여 타카노 후미코는 아름다움의 기저에 존재하는 죽음과 소멸에 대한 불안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듬해 발표한 두번째 작품집 <친구>는 독특한 북디자인(커버가 따로 달린)과 작품의 뛰어난 질로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봄 부두에서 태어난 새는>은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사건을 직접 독자에게 제시하지 않고 묘사된 인상으로 독자에게 재구성하게 만드는 그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섬세하고 천진난만한 소녀 츠유코의 시점에서 얻은 인상으로 독자는 또 다른 한 명의 소녀 후에코의 이야기를 구성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합쳐져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속독을 용납하지 않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주는 그녀 작품 특유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1986년엔 작가 유일의 장편(하지만 단 권)인 <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을 쇼각칸 쁘띠플라워에 연재, 이듬해 단행본으로 묶어서 발표했다. 이 작품은 <친구>에 수록된 <바비&허시>와 <데이비스의 계획>을 섞은듯한 느낌을 주는데 백화점을 배경으로 한 경쾌한 활극이다. 두번째 연재작은 1988년부터 1992년에 걸쳐 매거진 하우스사의 하나코에 연재한 <루키양>으로 이 작품은 타카노 후미코 작품 중 유일하게 문고판으로 나와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버블기의 일본을 살아가는 극히 평범한 OL 에츠코와 시대와는 동떨어진 마이페이스 생활을 유지하는 루키의 이야기가 유쾌하다. 이 작품 때문에 가끔 "치유계"로 오해를 받는다는 농담을 작가가 할 정도다.

1995년에 다섯번째 작품집 <막대가 하나>를 발표했다. 이 작품집은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르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인상에 충실한" 그녀의 스타일이 가장 빛을 발한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니이가타에 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인상을 가득 담아 그린 가작 <아름다운 마을>, 경탄을 금치 못할 밤의 묘사가 인상적인 <병에 걸린 토모코양>도 뛰어나지만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오쿠무라씨의 가지>로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인생의 한 순간이 사실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겹쳐져서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는 것을 묘한 SF풍 이야기로 그려내었다.

2002년에 (현재로선) 마지막 작품집인 <노란 책-자크 티보란 이름의 친우>를 발표했다. 이 작품집으로 테즈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수상했다. 완성까지 3년, 펜선을 넣는데만 1년이 걸렸다는 72페이지 작품인 표제작 <노란 책-자크 티보란 이름의 친우>는 그녀가 험난한 만화의 길을 통해서 어디에 도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 이르러서 그녀는 초기의 그녀 작품에 드러난 아름다움 밑에 존재하는 소멸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는다. 아름다운 것이 덧없기에 사람들은 슬퍼하지만 실은 그 덧없음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임을, 인생이 그렇고 청춘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듯 진정으로 덧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임을 한 소녀의 독서 체험을 통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2002년 이후엔 만화를 떠나 사실상 휴필상태에 들어갔지만 간간히 소품을 발표하고 있다.

간략한 경력을 보고 알 수 있듯이 타카노 후미코는 독특한 작가다. 거의 30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단 6권 밖에 작품집을 발표 안 한 과작의 작가면서도 그 존재감은 매우 강렬하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녀의 만화가 다른 만화가들의 그것과 차별되는 점은 인상에 충실한 묘사에 있다.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그녀는 직접 사건을 직접 제시하지 않고 그에 대한 인상을 그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읽으면서 작품 속 인물들이 가진 인상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게 만든다. 덕분에 그녀의 만화를 다른 만화처럼 "보면"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이른바 우라사와 나오키 등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만화", 별 생각없이 만화에서 제시된 컷들을 따라가면 그것으로 끝인 "보는 만화"의 폭력성을 그녀는 반대한다. "전 <고스트 바둑왕>이나 우라사와 나오키씨의 만화를 읽지 못하겠어요... 답답해요. 다른 곳을 쳐다보게 하지 않아요... 여유 부리면서 읽을 수도 없고, 읽는 스피드도 정해져 있어요"(유리카 타카노 후미코 특집호 오토모 카츠히로와의 대담)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재빨리 보면서 넘기기 보단 천천히 "읽을" 것을 권하며 항상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3년 걸려 그린 72페이지의 작품이 30분만에 읽혀지기를 원치 않는다. 이런 면에서 그녀는 타협을 모르는 고집쟁이다. 그녀가 언제 다시 작품을 발표할지는 모르지만 변함없이 천천히 그리고 끈기있게 아지랑이로 봄을 그리는 마법을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by 대산초어 | 2007/03/04 02:02 | 만화관련 | 트랙백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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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사노 at 2007/03/04 03:04
이런 작가도 상을 타는 일본이 좀 부럽습니다. 장인정신 가진 작가야 한국에도 많으시겠지만 타협을 모르는 불도저 정신이 통하는 만화출판업계가..........................

이 작자 궁금했었는데 멋진 설명 고맙습니다. (^^)
Commented at 2007/03/04 03:1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aystall at 2007/03/04 08:56
잘 읽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Commented by 과객 at 2007/03/04 10:53
우와...쥔장님 덕분에 또 한 명의 좋은 작가를 알게되어 너무 기쁩니다.
감사해요.^^ 이 작가 그림이나 분위기...이야기 진행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7/03/04 13:07
사노// 만화가들 사이에선 압도적으로 인기있는 만화가라고 하더군요. 이런 과작 작가가 살아남아 오래오래 읽히고 팔리는 만화계 환경이 역시 부럽습니다.

비공개// 자의식이 강한 작가이면서도, 독자를 무시하지 않는 자세가 특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세계가 확고하면서 그 확고한 세계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할까

laystal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객// 특집을 한 보람이 있군요^^.
Commented by 느루 at 2007/03/05 00:29
특집만세. 라고 부르짖다가도 한편으론 국내에서 구할수도 없는 작가에게 빠져버리게 만든 대산초어님이 원망스럽군요. 데츠카오사무 만화를 뒤늦게 수소문하다 한번 절망했건만. 흑.
Commented by 충키 at 2007/03/05 01:59
이 글을 읽고나니 작품들이 더 궁금해지는군요. (특집 만세!!!)
책 표지들도 참 예뻐요~^^

하야시 세이이치가 궁금해서 네*버에서 검색해보니
'겨울날'이라는 애니메이션에 참여한 것과
'별을 새기다'작가 나카노 시즈카가 악스만화 신인상(하야시 세이이치상)을 받았다는 것...
이렇게 두가지 정보밖에 없네요.
어떤 작가인지요? ^^a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7/03/05 11:01
느루// 죄송합니다^^. 타카노 후미코는 쓰게 요시하루처럼 이 블로그에 장기적으로 올라오게 될 지도 모릅니다.

충키// 하야시 세이이치는 1960년대말부터 "가로"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입니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아름다움밑에 감추어진 불안과 공포를 그려내었죠. 현재는 만화를 그리지 않고 소녀화를 그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작가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작품과 함께^^.
Commented by 충키 at 2007/03/07 02:41
아! 하야시 세이이치도 '가로'에서 활동했군요.
친절한 답글 감사.. 아니 고맙습니다~^^ (감사금지라니..)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7/03/07 17:58
충키// 원래는 감사표시자체가 금지인데... 적용하다보니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횡설수설)
Commented by 뎡야핑 at 2007/03/16 19:17
우아... 뒤늦게 읽고 감동. 역시 몇 번이나 읽게 만드는 만화였군요. 몇 번씩 읽고 있어요. 근데 쥬네라는 것은 그 쥬네인가요-ㅅ-? 야오이 만화잡지??
Commented by amalthea at 2007/03/16 21:08
그러고보니 절대안전면도칼의 주인공 둘은 남자였지요? :D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7/03/17 11:37
뎡야핑// 헉,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예리하십니다.(왜 생각을 못했을까...)

amalthea// 확실히 JUNE의 성격을 생각하니까 남자 둘이란게 조금 묘하게 느껴지는군요.
Commented by dameh at 2007/08/14 14:54
절대안전면도칼.. 30년전 만화라고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더군요, 죽음을 그토록이나 미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참..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7/08/15 23:24
dameh// 오히려 관념적으로 죽음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에 대한 조소가 느껴지는 작품이지 않나요?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두 소년이 이러쿵 저러쿵 떠들지만 결국 죽음이란건 그야말로 엉뚱한 그리고 아름답지 못한 일개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되지요^^.
Commented by 나르시스 at 2008/02/19 20:03
글 좀 쓸게요.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2/20 00:34
나르시스// 아, 제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가져다 쓰세요.(로컬룰 참조)
Commented by 특별한나 at 2008/11/27 00:50
와... 이 글을 읽으니 더 읽고 싶네요 ㅋㅋㅋ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11/28 00:42
언제고 정식으로 소개될 날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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