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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는 것>과 <계속 그리는 것>의 불안과 황홀(4/11)

간만에 후속편입니다.
중간에 콘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잘 몰라서 대충 옮겼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길... 그에 맞춰 수정하겠습니다.

바닥 위에 늘어놓은 세계

타카노 '노란 책'으로 담당 편집자를 3년 기다리게 했다고 하니,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질려하더군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러더라구요.

오토모 난 더 심한데 말야(웃음).

타카노 그렇죠(웃음). '막대가 하나'를 단행본으로 옮기면서 전부 다시 그릴 때도 한 선배가 "여유가 있으니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해서 많이 고민하고 그랬어요. 여유라는 건 경제적인 여유도 포함하는 거고 보통의 경우 더 열심히 그리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잖아요. 내용도 "여유가 없는 사람은 그릴 수 없는 이야기"라는 소리를 듣고 많이 고민했지요.

오토모 그런 걸로 고민하고 그랬구나, 의외네.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 아냐?

타카노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없으세요?

오토모 나야 딱히 경제적인 이유로 만화를 그리고 있지 않으니까. 가끔 이 일이 직업인가 아닌가 헷갈릴 때가 있단 말야. 결혼할 때도 마누라한테 "먹고 살 수 없으면 때려쳐야지"하고 말하기도 했는데, 먹고 사는 것과 자신의 스토리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결합되어 있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긴 하지. 그런 걸로 돈을 받고 있다는 게 왠지 이상하다고(웃음).

타카노 저도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이런 거품 같은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오토모 난 그렇게 부끄럽다고 생각하진 않는데(웃음). 나도 직업적 의무감 같은 걸 그렇게 많이 느끼지 않으니까 계속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물론 계속 그리는 편이 좋지만 무리해서 그리고 싶지 않은 것까지 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지금 만화는 다 엄청 긴데 그런 건 질질 끌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타카노 편집자는 '독자가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그러지요.

오토모 모두 그런 식으로 독자 탓으로 돌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실은 독자야 별 상관없지. 똑같은 이야길 가지고 40권, 50권을 어떻게 그리나 싶어.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걸 나한테 하라고 하면 못하지.

타카노 혼자 집에 틀어박혀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그만큼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요. 남편이 웃긴다고 할지 모르지만(웃음). 목욕탕 앞 옷을 벗는 데서 그리고 있으니 방해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이걸 완성 못 시키면 어떡하냐는 두려움이 3년 동안 계속 있었어요. 이렇게까지 몸을 망쳐가면서 그렸는데 완성 못 시키면 어떡할까 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처음부터 그리지 않았던 걸로 하면 된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오토모 그럴 순 없지. 실제로 그리고 있으니까 뭔가가 남잖아.

타카노 하지만 제 만화는 그리는 데 돈이 들지 않잖아요. 자료도 취재도 필요없죠. 그러니까 뭔가를 쏟아부었다는 느낌도 안 들어요. 원래 망상에서 시작한 거니 제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죠(웃음).

오토모 완성 못 시키겠다고 했는데 그건 맨 처음에 몇 페이지 정도의 이야기로 만들어야겠다고 구성을 생각할 때에 알 수 있는 거 아냐? 아니면 꽤 대충대충 그리고 있는 건가?

타카노 구성은 생각했어요. 이건 50 페이지론 무리다, 100 페이지까지 가고 싶지 않아... 이런 식으로요.

오토모 그런 식으로 처음 페이지 배분하고 그래?

타카노 그럼요.

오토모 대강의 스토리를 글로 써서 여기까지 이거, 이런 식으로 하잖아.

타카노 에피소드를 여기까지 몇 개 넣을까 그런 생각하지요.

오토모 어디에서 자크를 등장시킬 것인가.

타카노 그래요. 선배도 그렇게 하죠?

오토모 막연히. 예전에 'AKIRA'를 연재했을 땐 맨 처음에 첫 페이지부터 1, 2.... 이런 식으로 페이지 숫자를 넣고 그렸다고.

타카노 저도 그랬어요. 너무 많은 걸 집어 넣어서 수습안될 때도 있지만 여기까지 이건 넣어두지 않으면 안된다..뭐 그런 게 있고 그랬죠.

오토모 첫 페이지부터 숫자를 넣으면 표지가 1, 그 다음 두 페이지가 2-3, 그 다음 두 페이지가 4-5 인데 두 페이지에 이 정도 이야기는 넣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했지. '노란 책'은 그런 건 어느 정도까지 세세하게 정한 거야? 보통 이런 이야기와 이런 이야기를 넣자고 생각한 뒤에 이 페이지는 몇 페이지, 이 이야기는 몇 페이지라 정하고서 전체 길이를 결정하잖아.

타카노 그렇지만 그리는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길이가 늘고 그러지요.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신부터 연필로 콘티를 그려 가면서 셀로판 테이프로 점점 붙여나가요. 1페이지 6컷, 9컷 이런 걸요. 그걸 바닥에 깔아 놔요.

오토모 그건 어떤 이야기가 있으면 그 이야기로부터 연상된 그림을 늘어놓는다는 이야기야?

타카노 그렇죠.

오토모 어디서부터 시작이라든가, 첫 번째 컷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해놓지 않는구나.

타카노 정해놓지 않아요. 노트에 어머니의 자세나 몸짓같은 걸 그리고 쓸만하다 싶으면 네모낳게 가위로 잘라서 바닥에 놓지요. 그리고 다음 컷도 그런 식으로 놓아요. 대개 6 컷이 한 페이지 잖아요. 4 페이지 분량 정도를 바닥에 늘어놓고 '이 컷과 이 컷은 교환해야지' '이 컷은 크기가 크니까 다음 페이지에 써야겠다' 이런 식으로 해요. 그러니까 70 페이지라면 셀로판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게 70 장 늘어서게 되는 것이죠.

오토모 70 페이지를 전부 그렇게 하는구나.

타카노 그렇게 하는 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했어요. 펜선을 넣지 않고 연필 만으로 70 페이지 분량을 그렸죠. 이제 절대로 고치지 말아야기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그렇게 했어요. 배경도 연필로 그려넣고. 그걸 '자, 이제 펜선을 넣어야지' 하고 하얀 원고 용지를 얹고서 트레이스해 가는 거죠. 그런데 밑그림만 1년, 2년을 끌다보니 처음에 그린 부분이 연필이 흐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고 그렸을 당시의 기억이 희미해져 있고 그래서 좀 실패했던 것 같아요. 중간에 펜선을 넣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오토모 처음 시작할 때의 정열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할까, 거기까지 그린 뒤에 다시 앞부분을 보면 다시 고치고 싶어지지 않아(웃음)?

타카노 그렇죠. 그래서 고쳤어요(웃음).

오토모 나도 'AKIRA'를 그릴 때에 처음에는 그림 콘티를 할까 생각했었어. 컷을 나누고, 러프한 밑그림을 그리고 네임을 넣은 콘티. 그렇게 한 번 해봤는데 펜선을 넣을 때에 구도부터 컷까지 다시 그리게 되더라고. 절대로 똑같이 그리게 되지 않는다니깐. 그래서 '아아, 난 똑같은 짓을 두 번 할 인간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 콘티는 없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타카노 근데 그렇게 하면 페이지 수가 결국 늘어나버리지 않나요?

오토모 그래. 겉잡을 수 없게 되지. 'AKIRA'같은 장편을 그릴 때엔 그건 그거대로 되는대로 맡기면 되지. '노란 책' 같은 짧은 만화를 그렇게 그리면 난리나지. 72 페이지 분량인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타카노 그래요.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분량을 생각하면 그 정도잖아요. 100 페이지라도 상관없다고 하긴 했지만 뭐 이 이야기로 100 페이지는 너무 힘들죠.

오토모 지금 이대로도 너무 밀도가 높아(웃음).

타카노 중간중간에 흰 페이지가 들어가 있어서 쉴 수 있지 않나요?

오토모 이 개구리 4 컷? 그래서 넣었구나(웃음).

타카노 그래요. 이 쯤에서 저도 한 숨 돌려야겠다 싶어서(웃음).

오토모 정말로, 간만에 밀도가 높은 작품을 읽었단 생각이 들어.

타카노 전 일단 대충 읽고 나중에 2,3 번 다시 읽었을 때에 새로운 맛이 나는 만화라고 생각했는데요.

오토모 어디를 그릴 때 제일 재미있었어?

타카노 전반적으로 꽤 재미있었어요.

오토모 근데 아까 골치가 아프다고 했지만 또 좀만 있으면 그리고 싶어질 거야.

타카노 그렇지 않을 거예요(웃음). 근데 스스로 스케일이 작다고 생각해요. 이와아키 히토시가 '기생수'를 그리고 지쳐버렸다거나 우메즈 카즈오가 '나는 신고'를 그리고 지쳤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만 6 조랑 8 조짜리 두 방 이야기를 70 페이지를 그리고 지쳐버리다니.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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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산초어 | 2008/02/11 23:35 | 만화관련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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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YOMM at 2008/02/12 13:29
안녕하세요. 인터뷰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유익한 내용의 인터뷰 인거 같아요.
오래 전 이곳에서 졸역 쓰게요시하루 시리즈를 알게 된 후로
주욱 구독해왔던거 같은데 인사가 많이 늦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by 뎡야 at 2008/02/12 18:13
아무리 밀도 있는 작품이어도 왜 그렇게 그리는 게 느린 걸까 궁금했는데 이제 이해가 갑니당
Commented by 눈의엘프 at 2008/02/12 19:14
똑같은 일을 두번 이라;; 확실히 콘티짜고 나서 다시 그릴때 또 생각이 나는거니;;
Commented by 과객 at 2008/02/12 19:17
타카노 씨는 만화가라는 직업에 은근히 자조적이네요.ㅜ_ㅜ
자아도 꽤 강하신 듯한데 그걸 못 이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저도 만화를 그리고있긴 한데 콘티 부분의 해석이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나저나 요즘으로 치면 덕지덕지 붙은 노트콘티는 포토샵의 레이어층...?콘티짜는 방식이 특이하군요!
Commented by at 2008/02/13 06:34
논문 쓸 때도 어제 쓴 데를 읽으면 안 고치곤 못배기니까 되돌아읽기를 스스로 금하지요. 그나저나 72페이지에 3년이라니 외국어로 쓰는 논문보다 오래 걸리시는군요. 얼마나 완벽주의자인지 알겠어요.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2/14 00:24
YOMM//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으로도 계속 들려주세요.
뎡야// 작업 방식이 많이 특이하죠^^.
눈의엘프// 역시 많이 고치게 되나 보죠?
과객// 다행이네요. 너무 이상해서 이해가 안 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솔// 평균을 내보면 한 달에 2 페이지 정도네요. 정말 느리긴 느리네요...
Commented by 초록망아지 at 2008/02/16 12:20
대충 읽고 나중에 2,3 번 다시 읽었을 때에 새로운 맛이 나는 만화... 절대 동감입니다.
타카노 여사의 작품은 자꾸만 뒤적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지금 또 꺼내 읽고 있습니다요 ㅋ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2/18 00:31
초록망아지// 중독성이 심각하지요^^.
Commented by at 2008/03/03 16:51
아아 정말 도움이 많이 되요..
그나저나 3년이라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정말.. 정말.. 좌절스러울 정도군요.... 흑흑
잠시나마 타카노씨를 흉내내보려고도 했는데.. 그런 제가 부끄러워져요..
쉽게 이룬게 아니구나... 좀 더.. 노력하자.... ㅜㅜ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3/04 00:59
딩// 저도 완성에 걸린 시간이 3년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근데 계속 읽다보니 그만큼 필요하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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