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loos | Log-in


'잉크가 아닌 목숨' 쿠스노키 쇼헤이


쿠스노키 쇼헤이(楠勝平)의 본명은 사카이 카츠히로(酒井勝宏)로 태평양 전쟁의 끝이 보여가던 1944년 겨울에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간판에 글자를 넣는 기술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수영과 빙상을 좋아하는 활발한 소년이었지만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1956년에 류머티스성 열을 앓게 되었는데 그 후유증으로 심장판막증을 얻게 되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그는 이 지병과 계속 싸워야만 했다. 병 때문에 학교를 쉬는 동안에 주로 극화 잡지를 사서 보았는데 그가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동인지 활동을 하는 도중에 시라토 산페이의 '닌자무예장-카게마루전'을 읽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시라토 산페이를 동경하게 되었다.

1960년, 후에 가로의 편집장이 된 전설적인 편집자 나가이 카츠이치를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프로 만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다음해 그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던 시라토 산페이의 아카메 프로덕션에 들어가서 어시스턴트를 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이 악화, 수술을 받게 되면서 만화를 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의 수술을 담당했던 사카키바라(당대에 명의로 유명했다고...)가 수술을 성공시키고 난 후에 "완치된 것은 아니고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다"고 그에게 통지했다고 한다.

수술과 요양을 마치고 1964년에 복귀한 쿠스노키는 아카메 프로덕션에서 '닌자비화' '카무이전'의 그림을 맡게 된다. 나가이 카츠이치의 말에 의하면 시라토 산페이는 '제자'란 말을 대단히 싫어해서 '누구누구가 선생님 제자 아닙니까'라고 누가 묻기라도 하면 완강히 부인했는데 유일하게 쿠스노키 쇼헤이만은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쿠스노키는 시라토의 유일한 제자였고 스승인 시라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카메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동안에 가로에 발표한 '센마루'는 모든 면에서 시라토 산페이의 영향이 여실히 드러난다.

1965년, 자신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 아카메 프로덕션을 퇴사하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가로와 COM에 단편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시라토 산페이의 영향을 받아선지 시대극을 주로 그렸으나 그의 시대극은 시라토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 당시 시대극의 주류는 닌자나 검호가 나오는 선 굵은 액션물이 주류였으나 그는 시정 생활을 섬세하게 그렸다. 1960년대 당시에 이런 작가는 거의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로와 COM은 비주류 상업지였기에 고료도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그려나갔다. 1960년대의 쿠스노키의 작풍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오센'과 '임시 뉴스'를 들 수 있는데 전자는 쿠스노키 특유의 섬세한 시대물, 후자는 일상 속에 비일상이 끼어들어오는 순간을 보여주는 현대물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 쿠스노키는 활동 영역을 일반 상업지로 넓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을 보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던 것처럼 귀기가 넘친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는 '후세의 흐름' '커다란 방' '색색눈에 나는...' '너덜너덜너덜' 등은 전부 죽음을 다루고 있는데 읽다 보면 잉크가 아닌 피로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한창 활동 영역을 넓히는 도중이었던 1973년 7월에 그의 심장은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재수술한 보람도 없이 1974년 3월 15일에 30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사실 쿠스노키 쇼헤이는 일본에서도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니다. 작품집은 단 세 권뿐이고, 그것들도 그리 많이 팔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혀져선 안 되는 만화가다. 만화평론가인 쿠레 토모후사가 지적했듯이 만화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로 흐르면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잃어가는 지금이야말로 쿠스노키 쇼헤이는 다시 읽을만한 가치를 지닌다. 잉크가 아닌 목숨으로 만화를 그렸던 그의 명복을 빈다.

-'색색눈에 나는...'에 실린 연보, 나가이 카츠이치의 '가로 편집장'을 참고로 작성.

앞으로 졸역을 진행할 만화는 '임시 뉴스' '후세의 흐름' '커다란 방'이 될 예정입니다.
가능한한 7월 중에 마무리지을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by 대산초어 | 2008/07/11 14:20 | 만화관련 | 트랙백(1) | 덧글(14)

트랙백 주소 : http://bjkun.egloos.com/tb/382099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The race tha.. at 2008/07/13 16:37

제목 : 彩雪に舞う…― 楠勝平(쿠스노키 쇼헤이) 作品集
대산초어님의 '잉크가 아닌 목숨' 쿠스노기 쇼헤이 글과 함께 합니다. 눈치 챈 분들도 있겠지만, 내 닉네임 '다음엇지' 는 cartoon의 순수한 우리말로 '漫畵' 와 동의어로 씌인다. 글자도 제대로 못 읽던 시절 무척이나 귀여워 해주시던 만화 가게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처음 접하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도 손에서 놓치 못하고 있다. 만약에 나에게 문학적인 감수성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보다는 만화에 의해서 형성된게 아닐까 한다. 일본어......more

Commented by 다음엇지 at 2008/07/11 16:32
역시 대단하십니다. -_-;;; 일본에서도 마이너 중에 마이너인 작가인데.. ^^ 70년 8월호에 특집이 실렸죠?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7/12 01:50
그 특집호는 구경도 못 해봤습니다^^. 쓰게 특집호는 이케부쿠로의 중고 서점에서 보긴 했었는데요.
Commented by evax at 2008/07/11 18:28
작가에 대한 소개를 읽고 다시 작품을 보니 그 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국어 시간에 공부 하는거 같기도 함니다^^;)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7/12 01:52
실은 제 전공이 국어교육이긴 합니다, 하하.
Commented by 뭉민 at 2008/07/11 19:10
야호! 신나는 특집시간..)지난번에 올려주신 '오센'을 인상깊게 보아서 기억에 남았던 작가였는데 이렇게 또 자세하게 알려주시니 로컬룰을 어길 수 밖에 없네요..ㅜ_ㅜ너무 좋습니다.감사해요.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7/12 01:52
로컬룰 단속 강화기간을 설정해야겠네요. 요새 들어 어기시는 분들이 너무 많으시다능.
Commented by M at 2008/07/12 01:08
너무 아까운 재능이 오래 못 가고 사라져 버렸네요..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오래도록 작품활동을 하셨다면 어떤 작품들이 나왔을지..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7/12 01:53
많이 아쉽죠. 후기로 갈수록 작품이 더 좋아졌거든요...
Commented at 2008/07/12 19: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7/13 08:49
아, 닉네임 바꾸셨군요. 누구신가 했습니다.
Commented by 위호지처 at 2008/07/14 11:47
30살이라니..너무나도 젊군요 ㅠㅠ
아래 작품도 정말 잘 봤어요. 이번 특집도 정말 기대 됩니다.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7/16 20:29
앞으로 단편 세 편 정도를 더 옮기려고 하는데 그것들도 잘 보셨으면 좋겠네요^^.
Commented by 충키 at 2008/07/14 13:50
지병과 만화가의 길..
카툰작가 지현곤씨도 '7세에 척추결핵에 걸려 하반신 마비 증세로 40년간 방안에 칩거중'이라더군요.
지난 3,4월에 뉴욕에서 초대전을 가졌으나 결국엔 못 갔다고 하더라구요.
5월엔 서울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그때 전시된 창작노트 중에서 인상적인 글이 있어 적어두었습니다.
'나는 죽기위해 태어났으나 다시 살리라.
동물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이 하나 되는 날
나는 다시 살리라.' 1996년1월 26일 금요일
Commented by 대산초어 at 2008/07/16 20:27
그런 분이 계셨군요. 치열하게 사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네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