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것>과 <계속 그리는 것>의 불안과 황홀(9/11) 만화관련

만화가와 그림 사이의 거리감에 대한 오토모 카츠히로의 발언이 인상적입니다.

간호부인가 일러스트레이터인가 그것도 문제로다!?

오토모 'AKIRA'가 끝나고 난 뒤, 만화를 잠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 질렸거든.

타카노 만화에요?

오토모 내 그림과 그리는 법에. 그만큼 하면 역시 질리게 되어 있어. 계속 하고 있으면 점점 '선생님'이 되어간단 말야. 편집자도 "그럼 선생님 어디로 모실까요, 남극은 어떠신지?" 요러고, 그렇게 지위가 높아진다고 할까, 내 자신이 고집불통이 되어 가는 게 싫어. 처음으로 들어가는 곳이랄까, 다른 장르에 들어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잖아.

타카노 네, '처음 뵙겠습니다'하고 들어가고, 선배도 있고 그렇죠.

오토모 그래, 그런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장르를 바꿔서. 'AKIRA'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던 시절엔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어 보여'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AKIRA'의 연재가 끝나고 난 뒤에 만화를 계속 그리지 않고 쭉 애니메이션 제작을 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어.

타카노 'AKIRA'가 끝나고 다시 만화를 그릴 생각은 안 하셨군요.

오토모 더 많은 사람들과 작업을 하고, 자신이 항상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씩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야 자기 자신이 신선함을 잃지 않지. 물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역시 그런 식으로 해야지.

타카노 계속 한 우물만 파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만 남게 되지요. 편집자라든가.

오토모 그리고 어시스턴트라든가. 항상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겸허해져야지. 그런 생각으로 해왔던 건지도 몰라.

타카노 저도 간호부를 할까 생각하곤 했어요. 항상 간호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때때로 간호부 아르바이트도 했었고 서른 다섯살이었을 때 꽤나 진지하게 다시 간호부를 해볼까 생각했었죠. '러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과 '아름다운 마을'을 그렸을 때에 이렇게 현실성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건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동창 중에 간호부가 잔뜩 있는데 그쪽이 더 꾸준하기도 하고 해서요, 양로원에 간호부로 3개월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했어요. 매일 나간 건 아니었고요. 근데 엄청 서툴렀어요(웃음). 환자 앞에 나가면 두근대고 긴장되고 해서 잘하지 못하고 선배에게 혼나고 그랬죠. 근데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서툰 간호부라면.

오토모 그것 말고 딴 건?

타카노 일러스트레이터가 있겠네요...... 일러스트는 못할 것 같지만요.

오토모 응, 왜?(웃음)

타카노 다른 사람에게 '여기 그림을 이렇게 그려주세요'란 소리를 듣는 순간, 못 그리겠더라구요. 성격이 꼬이기도 했고. 대체로 별로 좋지 않은 기억만 남기고 끝났어요. 의뢰한 사람은 좋아하지만.

오토모 그래선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터는 못하지.

타카노 못하죠. 소파에 앉아 쉬는 장면을 그려 달라는 의뢰가 있었어요. 근데 몇 번을 그려도 제겐 도저히 소파에서 쉬는 그림이 잘 안 그려지는 거예요. 하지만 의뢰한 사람은 주택 안내 팜플렛이라 방석은 안 된다고 하고.

오토모 하하하, 그럼 안되지.

타카노 거의 울면서 그렸죠. 못하겠다고 그러면 저쪽에선 '이렇게 이렇게'하고 밑그림까지 그려주고 그래요.

오토모 거기까지 그려 준다고?

타카노 네, 그 밑그림을 '루키 씨'의 그림으로 해주세요 하고요. 하면 할수록 짜증이 나더라구요.

오토모 잘 안 맞나보네.

타카노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요. 그래서 막상 감정이 담기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법을 생각하면 실제로 종이 위에선 못할 것 같더라구요.

오토모 (웃음). 왜 못하겠어? 그게 문제네.

타카노 글쎄요... 그러니까...

오토모 그게 '테마'야. 왜 그렇게 싫어하지, 감정이 담긴 그림을?

타카노 글쎄요.

오토모 맞다, 그냥 청개구리라서일지도 모르지. (타카노도) 잘 알겠지만 나도 그런 건 좀 그렇더라고. '이렇게 그려주세요' 하면 싫어지는 거. '이렇게 그려주세요' 해서 그렸지만 내 안엔 좀 더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있고 나는 이렇게 그리고 싶다고 생각이 들고 그렇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건 자신의 그림에 질렸다는 소리야?

타카노 자신을 마주 보는 그런 느낌이 들잖아요. 그게 싫어요.

오토모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싫은 거야?

타카노 네, 그래서 간호부면 되는데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일러스트레이터쪽이 손쉽고 좋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이런 소리 했다간 일러스트레이터분들에게 혼나겠죠?

오토모 그림을 그리다보면 아무래도 역시 자기 그림이 나오잖아.

타카노 안 나오게 하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오토모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겠다니 이상해(웃음).

타카노 그럴까요? 애니메이션은 자기 그림이 나오지 않잖아요. 트레이스도 하고 하니까.

오토모 아냐, 역시 나오더라고. 구도 같은 건 내가 그리니까.

타카노 그런가요. 데생이 어쩌구 하기 이전에 구도에서 나와 버리는군요.

오토모 스탭이든 스폰서든 돈을 투자하는 사람이든 그런 걸 바라니까. 타카노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는 사람은 그걸 바라고 있단 말야. 그런데 그걸 싫다고 하니 일러스트레이터는 못 하겠네(웃음).

타카노 시리아가리 코토부키 씨는 원래 광고 관련 일을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오토모 그 사람 그림이 참 재미있는 것 같아. 그림을 '사용하고 있는' 그런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아. 나는 내 그림을 좋아한다거나 밀착해 있다거나 그런 느낌이 있는데 시리아가리 코토부키는 쿨하지.

타카노 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거군요. 시체 같은 것도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단순히 거친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있는 건가요?

오토모 '한밤중의 야지 씨 키타 씨' 같은 작품은 엄청 재미있었지. 그건 나처럼 그림에 집착하는 사람에겐 그리기 어려워. 자신의 그림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자신의 상상력을 마구 펼쳐대는 이야기는 만들 수가 없어. 그런 그림과의 거리감이 사람마다 달라.

타카노 그런가요? 오토모 선배는 '딱 달라붙어 있음'?

오토모 난 말야, 어딘지 모르게 내 그림을 좋아하고 그래.

타카노 저도 '딱 달라붙어 있음'일까요?

오토모 응. 그래서 지금까지 속앓이하고 그랬던 거 아냐?

타카노 아, 맞다. 그랬지요(웃음).

오토모 그래서 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고 했었고(웃음).

타카노 그럼 '시리아가리 씨 방식'이란 수도 있다는 거군요.

오토모 응, 하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해.

타카노 과제가 하나 늘었네요. 연구해야겠어요. 그런 식으로 계속 만화를 그려가는 방법도 있군요.

오토모 유무라 테루히코 같은 그런 그림도 내 안엔 없는 부분이야. 그런 엉망진창스러움, 못 그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 그림을 아무렇게나 쓰고, 낙서처럼 만들고, 화면 대부분을 그런 그림으로 채우고. 분명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림과의 거리, 그림을 어떤 식으로 쓰는가. 그렇게 그림을 '사용한다'는 것은 난 상상도 못 했으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림은 수단이거나 목적이거나 하잖아. 그 사람들은 달라. 도구야. 직접 물어본 게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웃음). 그런 식으로 그림을 사용하면 우린 '굉장하다'고 생각해 버리지. 시리아가리 코토부키의 '야지키타'를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원근법이 어떻고 구성이 어떻고 그런 거 말고. 타카노도 그런 곳에 가고 있는 걸거야, 분명.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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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미본 2008/08/22 07:51 # 답글

    그림에 대한 생각들이 눈여겨볼 만 해요.
    잘 읽고 있습니다.
  • 대산초어 2008/08/24 12:40 #

    오토모 카츠히로의 시각이 재밌지요^^.
  • 네르후 2008/08/22 09:25 # 답글

    junhoo:

    와.. 정말 좋은 텍스트들이네요.
    그림을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는 그림.. 그렇지 않고 밀착되어 있는 그림.
    제게도 제 스스로가 드러나지 않는 그림이라는 것은 참 어렵다고 생각해요.
    애니메이션을 했을 때에도 아주 미묘하게 그것들이 비쳐올라보여서 당황했는데,
    저만 그렇게 느낀것이 아니었군요;

    그리고.. 저도 더더욱 밀착되어 보이고, 제 스스로가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지금의 저의 그림은 참 제 스스로가 뵈기 싫어서도 딜레마네요 크크..
    일로 그림을 그려야 하다보니까, 쿨해뵈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때가 많아지거든요.
    용도에 따라 쿨해야하는 그림, 밀착되어야하는 그림이 따로 있어서,
    그 사이에서 고민을 굉장히 하게 되더라구요.

    저 같은 경우, 저도 모르게 점점 쿨해지는 거 같아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데..
    저런 고민을 자유롭게 밷어내시는 두분이 참 부럽기도 하고,
    제가 보기엔 뭔가 방향이 보이는 거 같아 신납니다. ^^
  • 대산초어 2008/08/24 12:41 #

    졸역이지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 vikiniking 2008/08/22 09:59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 대산초어 2008/08/24 12:41 #

    다음 분량도 재미있으니 기대해 주시길^^.
  • D069 2008/08/22 20:53 # 답글

    만화 밸리에서 보고 왔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대산초어 2008/08/24 12:42 #

    방문 감사합니다.
  • 박씨 2008/08/23 02:35 # 삭제 답글

    새벽에 여러가지 생각을 해주게 하는 글이네요.
    그림을 사용하는것과 밀착하는것. 아 심오합니다...
  • 대산초어 2008/08/24 12:43 #

    요즘 '야지키타 in deep'을 읽고 있는데 오토모 카츠히로의 저 말이 도움이 많이 되더군요.
    만화로 컴백 좀...
  • 이지민 2008/08/23 06:44 # 답글

    오-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시리즈에요 역시 ㅜㅜ 두 작가님 너무 좋아합니다
  • 대산초어 2008/08/24 12:45 #

    은근히(!) 인기가 있는 시리즈군요^^.
    처음에 시작했을 땐 스스로를 저주했는데 끝나가니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과객 2008/08/23 20:26 # 삭제 답글

    울면서 그리다...
    얼마전 어떤 일을 받았을 때 정말 그런 심정으로 그렸었죠. ㅜㅜ
  • 대산초어 2008/08/24 12:47 #

    그러셨군요. 잘 하셨는지...^^?
  • 쟝고 2008/08/24 19:06 # 삭제 답글

    정말 좋은 글이네요.
    덕분에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저의 그림에 대해서.
  • 대산초어 2008/08/25 02:00 #

    ㅎㅎ 쟝고 님은 어떤 타입이신지요^^?
  • 뭉민 2008/08/25 12:13 # 삭제 답글

    타카노 후미코는 그렇게 좋은 만화를 그리면서도 계속 만화가라는 직업에 확신을 갖지 못하시는군요..ㅠ)ㅠ!
    왠지 멋지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대산초어 2008/08/26 00:42 #

    픽션에 염증을 느낀다고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지금은 유유자적하게 지내시는 것 같은데 얼른 복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2008/08/25 17:06 # 삭제 답글

    역시 대가들은 무슨 대화를 해도 옆에서 배울점이 넘쳐나는군요.
    오토모님은 타고난 크리에이터 같아요. 타카노님은 본인이 꼬였다고 하는데 맞는 것 같고요. 두 사람 다 저와는 다른 시대를 산 사람들이라 가치관의 차이가 느껴져서 재미있어요.
  • 대산초어 2008/08/26 00:44 #

    타고난 크리에이터 재능을 만화에 좀 쏟아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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