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늪 (쓰게 요시하루, 1966) 1001만화

사실 쓰게 요시하루는 만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가라기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만화가 진지한 예술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낸 작가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의 등장 이전에도 만화는 예술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만화를 바라보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쓰게 요시하루가 '태엽식(혹은 나사식)'을 발표한 것은 그래서 일본 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늪'은 '태엽식'보다 먼저 잡지 '가로'에 발표된 단편이다. 한 사냥꾼이 사냥하러 산속에 들어갔다가 늪가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의 집(정확하게는 그녀 형부의 집)에 사냥꾼은 하루 묵게 되었고 자는 도중에 소녀의 목을 조르려고 시도하다가 그만둔다. 아침이 되어 집을 빠져나온 사냥꾼은 늪가에 서서 하늘을 향해 가지고 있던 산탄총을 쏜다.

쓰게 요시하루는 침강과 고독의 이미지를 가진 소재들을 다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것에게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을 안겨준다. 형부의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 늪에서 퍼덕이는 기러기, 새장에 틀어박힌 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소녀가 기러기의 목을 비틀면서 보여주었듯이 죽는 것 뿐이다. 하지만 사냥꾼이나 소녀나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다. 고독을 견디면서 살아가야할 뿐이다.

이 '늪'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끼치게 완벽한 작품이다. 심지어 작품의 여운마저 제어하려고 하는 쓰게의 예술가적 야심이 엿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냥꾼은 하늘을 향해 산탄총을 쏘지만 결국 그 산탄들은 늪에 처박히고 말 것이다. 이 작품이 미치도록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완벽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덧글

  • M 2008/09/15 20:47 # 삭제 답글

    글에서 전문가의 향이 느껴집니다. 전공을 살리신 듯?
    첫문장에 정말 깊은 공감이 됩니다. 나사식이 아닌 늪인것은 더 좋게 평가한다는 뜻인가요?(발표여부를 떠나서요)
  • 대산초어 2008/09/15 23:40 #

    '태엽식'보다 '늪'을 더 높게 평가하긴 하지만 더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만화는 제 전공도 전문도 아닙니다. 아는 건 쥐뿔도 없죠.
  • 2008/09/19 04: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대산초어 2008/09/19 17:20 #

    네, 그런 경향이 없지않아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그런 계층 입맛에 잘 맞을만한 만화지요.
  • 이지민 2008/09/19 21:34 # 답글

    예전에 올라왔을때 보고는 가슴이 눌리는것처럼 답답하다고 느꼈어요
    늪이 더 완전한 느낌이 들지만 나사식은 재미있어서 좋더라구요.
  • 대산초어 2008/09/19 21:55 #

    '나사식(혹은 태엽식)'이 훨씬 유머러스하고 재미있죠.
  • 날날 2008/09/21 00:34 # 삭제 답글

    영화 텐텐에 잠깐 쓰게 요시하루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케부쿠로&&?' 란 작품얘기였어요.
    혹시 번역하신 적이 있나요?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 대산초어 2008/09/21 09:40 #

    아, '이케부쿠로 백점회'가 나왔나 보네요.
    만화가인 주인공이 소설가 지망생이랑 이케부쿠로 백점회라는 상점 안내 카탈로그를 만드려고 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단편이에요.
  • miffy 2009/05/27 22:12 # 삭제 답글

    블로그를 읽다가 오늘 아키하바라 나가서 소학관 문고의 '나사식'을 사왔습니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장편소설을 읽고 난 후의 여운같은 느낌이 남는 것이 참 독특하더군요.
  • 토버모리 2009/06/03 09:21 #

    이 블로그에선 '태엽식' 표기를 지지합니다 ㅎㅎ.
    쓰게의 작품은 고도로 압축되어 있어서 읽고 나면 그런 느낌이 들죠.
  • 이김수 2017/08/06 09:14 # 삭제 답글

    요시하루의 책은 어디서 구입할 수 있을까요?? 윗분처럼 일본으로 가야하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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