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하기오 모토, 1992) 죽기전에꼭읽어야할1001편의만화

하기오 모토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렸던 장편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그 내용의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중 하나로 손꼽힐만하다. 작품이 전개되어 가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지극히 자연스럽고 세심하게 묘사한 하기오 모토의 솜씨 덕분에 매우 특별한 상황 속에 던져진 인물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데에 그렇게 큰 어려움이 느껴지진 않는다.

주인공 제르미와 그의 어머니 산드라 앞에 그레그라는 부유한 영국신사가 나타난다. 그레그는 산드라에게 청혼하고 산드라는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한다. 하지만 그레그가 노렸던 것은 산드라가 아닌 제르미. 그레그는 제르미에게 자신과 동침하지 않으면 산드라와의 약혼을 파혼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제르미는 이에 완강히 거부하지만 파혼 때문에 산드라가 자살을 시도하자 단 한 번을 조건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레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르미는 점점 부서져간다. 견디다 못한 제르미는 그레그의 차에 사고가 나도록 조작을 하고 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동차 사고로 그레그는 죽는다. 산드라와 함께. 그레그의 아들인 이안은 장례식 때 제르미의 반응을 보고 제르미가 둘의 죽음에 관련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여성 만화가가 동성애를 다룬 만화를 그릴 때 종종 듣는 비판으로 '자신의 여성성에서 도망쳤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 그런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만약 제르미가 여자였다면 묘사된 상황의 끔찍함이 현실적으로 다가와 그리지도 읽지도 못할 작품이 되었을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끔찍한 상황을 겪고 난 뒤에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된 제르미와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되고 마는 이안의 러브 스토리는 결국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불완전한 대답을 내놓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는 자기자신을 발견할 때,  이 작품의 본질에 닿은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인상적인 캐릭터가 대단히 많이 나오는 작품이지만 특히 주인공인 제르미는 그중에서도 눈에 띈다. 하기오 모토의 뛰어난 심리묘사를 통해 생명력을 얻은 제르미는 그의 고통스러운 삶에 독자들을 끌어들여 함께 그 고통을 맛보게 한다. 그가 '난 이안의 남창이면 돼'라고 이안에게 쏘아붙일 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독자를 상상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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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09/03/07 14:00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대산초어 2009/03/07 21:05 #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소년)으로 변형시켜서 표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M 2009/03/07 23:24 # 삭제 답글

    아직 완결은 안봤지만 몇권째부터 피해자의 치유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더군요
    그런데 초반 몇권은 정말 악을 쓰며 봤네요
  • 대산초어 2009/03/07 23:24 #

    초반에 그레그 때문에 읽기를 포기하시는 분들이 꽤 있더군요.
  • 달리 2009/03/08 03:37 # 삭제 답글

    굳이 만화에 만화가 자신을 투영시킬 필요는 없는데 그걸 가지고 비판할 것까지야.^^
    재미있는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동성물 취향...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저에게도 명작이었습니다.
  • 대산초어 2009/03/08 10:42 #

    근데 소년이라고 표현된 인물들이 별로 소년스럽지 않다는 점에선 비판이 이해가 가기도 해요.
  • Brightside 2009/03/08 13:22 # 답글

    안녕하세요. 그간 눈팅만 하던 블로그인데(그간 좋은 포스트들 정말 잘 보았어요.감사합니다.)잔혹신과 BL얘기가 사소하게나마 잠깐 나오자 왠지 나서고 싶어져서 리플을 답니다.^^;

    저는 제르미를 소녀가 아닌 소년으로 설정한것을,특별나게 BL적 관점이나 여성성에서 도망친다 라거나,여성이 여성의 성적수난을 묘사한다면 그것이 과도한 압박이란걸 피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특별나게 여성,남성 자체에만 염두를 둠이 아닌 한 순수한 영혼이 감내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 자체에 무게를 두기 위함이라 생각했어요.사실 BL이 여성성에서 도망친거라는 견해에는 bl향유자 분들이 전적으로 수긍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할거라 봅니다.여성성 그 자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고요. 실질적으로 ‘자신’을 소년,남성에 대입하는것도 꼭 들어맞지만도 않는게, 여성들이 BL을 보면서 특별나게 공수 한쪽에 전적으로 자신을 이입해 보지 않거든요.흔히들 ‘수’에 대입한다고들 생각하지만 그건 적극적 BL향유자가 아닌 분들의 가장 잦은 오해중 하나이구요.실제로는 '공'에 대입을 하는 예도 많구요 거의 작가의 시선과 독자의 시선이 일치하는곳에 감정이입이 됩니다.실지로 '수'는 거의 대상으로 보게되는 예가 많고,성적대상이라 해서 그 인물의 생각이나 행동에 수긍이나 이입이 불가능한것만도 아니구요.
    여하튼 그 부분은 간단하게 단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설령 그렇더란 결론이 나온다 해도 그 이유 자체도 굉장히 중요하다 보구요.

    성애적 굴레 혹은 필터만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의식적으로 표현한것이 아니기에 이 만화 특유의 모순적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되고,육신과 영혼에 가해지는 고통이 모두 나오지만 크게 영혼에 미친 고통과 그 치유과정이 중점이 되어 표현되는 영혼에 관한 한편의 시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적고나니 좀 횡설수설같고 좀 기네요.어쨌든 한번 얘기해 보았습니다.-////-
  • 대산초어 2009/03/08 17:02 #

    의견개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부분이 좀 선정적이어서 다들 그 부분에 주목하시는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저런 비판은 제가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있는 비판이구요, 제 경우엔 완전히 동의한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관점을 잡는 데에 참고삼아 이용하는 정도입니다.
  • 시바우치 2009/03/08 17:38 # 삭제 답글

    [은유로써의 소년애](맞던가...)라는 소년애 장르나 BL을 주로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책에서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를 개념적으로 "안티BL"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는 BL이 리얼이 되면 이렇게 된다고 한 적도 있구요(...) 뭐 적어도 BL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요...그런데 대체 한국 웹에 여태까지 돌아다니는 BL의 시초 어쩌고 하는 너무한 뜬소문은 언제 수정될련지OTL
    소년애나 BL장르의 소년/남성의 "여성화" 비판에 대해서 볼 때마다 사실 발화자의 성적 불안감이나 일종의 여성혐오(구체적으로는 여성이 남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원래 성애적 장르는 당연히 극단적인 대상화와 자기이입이 양립하기 때문입니다. 남성향 포르노/에로물의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지극히 남성적인 성욕 드라이브같은 것이 그렇지요. 극단적인 대상화가 이루어지기에 주 수요층의 특정 본질과 경향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데 유독 여성향 장르에 대해 (여전히) 그런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중잣대나 장르의 특성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 시바우치 2009/03/08 17:49 # 삭제

    아 물론 대산초어님이 그렇게 속 좁다는 건 아니고요ㅎㅎㅎ
    게다가 소위 말하는 떡대계(...)는 설명이 안되는 것이기에...
  • 대산초어 2009/03/08 18:45 #

    본문에선 BL의 V도 꺼내지 않았건만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퐈이어! 되어서 급당황중입니다 ㅎㅎ. 남성향이든 여성향이든 원래 포르노는 항상 비판과 함께 존재하는거죠. 물론 그냥 '쿨타임 됐다, BL 까자'란 사람도 있겠지만...
  • 효우도 2009/03/10 02:56 # 삭제 답글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나 같은 경우는 초반의 서스펜스물 같은 분위기가 맘에 들어서 보다가 후반에 조금 지루해졌지요. 망가진 소년이 회복하는 후반의 스토리도 좋지만요.
  • 대산초어 2009/03/10 09:00 #

    아무래도 몰입도는 초반이 좋지요.
  • 느루 2009/03/10 17:47 # 삭제 답글

    이 작품을 완결이 다 난 후에, 20대가 지난후에 보게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이야기를 잡지 연재로 봤을 당시의 소녀들에게 위로를.
  • 대산초어 2009/03/11 20:29 #

    소녀들 지못미ㅎㅎ.
  • 2009/03/11 15:26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대산초어 2009/03/11 20:31 #

    제가 12일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ㅎㅎ. 보게 되면 아마 다음주쯤이 될 것 같은데 괜찮으면 감사덧글을 안 괜찮으면 원망덧글이라도 달아드리겠습니다.
  • zoddd 2009/03/17 22:02 # 삭제 답글

    한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몇겹의 층을 준비한 걸까 하는 생각에 ,
    읽는 내내 떨어졌다 올랐다를 반복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당당히 화면에 등장하는 그레그의 속삭임 이라던지
    몇겹의 실크장막을 걷어내며 거푸 과거의 자신을 만나게 되는 이안을 보면서,
    연극적 연출, 특히 공간 분할에 능통한 사람인 것 같다.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이건 전혀 다른 얘기지만, 어쩌면 사랑의 요체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그레그가 아닐까 하는 비뚤어진 생각도 들더군요.

  • 대산초어 2009/03/17 23:09 #

    확실히 사랑에 대한 그레그의 지적도 매우 적확해서 부정하기가 힘들죠.
  • 하황 2009/03/29 21:17 # 삭제 답글

    사실상 이 만화는.. 요즘 말하는 BL이란 장르로 정의하기 보단(굳이 분류하자면..)
    '동성애'적 코드가 나오는 만화로 분류하는편이 더 쉬울것 같아요..
    솔직히 일부 만화 보는 사람들이 이 만화를 요즘같은 상업적인 BL로 볼까 겁납니다..^^;;
    성적학대를 당하는 주인공을 왜 굳이 소년으로 설정한건지 조금 의문은 있었지만,
    물론.. 제르미가 그래그나 이안과 같은 '남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긴하지만,
    그렇게까지 작품의 스토리에 너무나 빈번히 강요되지는 않는걸로 봐서 작가는 제르미가 '남자'라는것에 대해서 막~ 그렇게까지(<표현이;) 크나큰 의미를 두진 않았을거라 생각됩니다.

    음.. 그리고 일단 다른건 재쳐두고;; 가볍게 생각했을 때는 성적학대를 당하는 주인공이 '남자'라는것에 대해서 뭔가 독특한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요.

    아직 이 작품을 끝까지 보진 못했습니다만[애장판으로 조금씩 사가며 읽고있어서..ㅠㅠ]
    정말 이작품은......한인물 한상황 그냥그냥 그려나가는 법이 없더군요..덜덜..
    솔직히 처음 그레그에게 넘어갈때는 감성적인 심리묘사에 대단하다! 라기보다 독특함을 느끼면서 봤었는데,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더군요.. 초반에 린포레스트 저택에서 그래그가 제르미에게 "문열어!"하며
    협박하는 장면은 마치 내가 당하는듯..(그때서부터 본격적으로 빨려들어간것 같습니다.)
  • 대산초어 2009/03/29 23:51 #

    이 작품을 상업 BL로 볼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어요^^.
  • 덕덕 2009/08/26 20:33 # 삭제 답글

    아직 토마의 심장과 방문자 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림체가 정말 다르네요!;
  • 대산초어 2009/08/27 23:13 #

    네, 많이 달라졌죠. 개인적으론 좀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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