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치코 (쓰게 요시하루, 1966) 1001만화

이젠 거의 예술만화가의 대명사격으로 취급받는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들이 딱딱하게 박제된 예술품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로 그 서정성을 들 수 있다. '치코'나 '붉은 꽃', '해변의 서경' 같은 작품들이 주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30여년이 넘은 지금도 빛바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작가 자신의 동거생활을 만화화한 '치코'는 특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치코'는 1966년에 가로에 발표된 18페이지짜리 짤막한 단편이다. 주인공은 인기 없는 만화가로 호스티스인 애인과 동거중이다. 어느날 그녀는 갑자기 문조를 갖고 싶다며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문조 한 마리를 산다. 문조를 키우기로 한 그날에 그녀는 가게에서 자신을 지명해 준 손님과 따로 드라이브를 하고 취한 채 돌아오고, 주인공은 그녀를 추궁하지만 자신의 무능력함 덕분에 오히려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이 문조 '치코'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것도 한때, 그만 주인공은 실수로 치코를 죽이고 만다. 주인공은 치코가 야반도주했다며 그녀에게 둘러대지만 그녀는 좀처럼 믿지를 않고 뜰을 파헤쳐 치코를 찾으려고 한다. 치코를 찾았다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란 주인공이 황급히 나가 보는데 그가 본 것은 진짜 치코가 아니라 치코를 그린 그의 그림이었다.

치코가 정확하게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해석이 분분하다. 치코를 낙태한 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며 혹은 작품 속 애인의 대사대로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간에 치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날아가 버린 치코의 그림은 우리는 결코 그것들을 붙잡을 수 없으며, 그것들을 붙잡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말하는 듯하다.

덧글

  • 위호지처 2009/04/23 04:15 # 답글

    영어 스캔레이션으로 늪, 버섯따기, 치코가 있던데 영미권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 인지 평점이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치코에 대해 쓴 짤막한 리뷰선 그림도 성의 없는 데다 인물성도 개연성도 없으며 마지막엔 특히 이해가 안 가서(& 치코랑 놀다 죽이는 부분) 도대체 뭐가 대단한지 모르겠다고 써 둔 기억이 나네요. 이래서 시라토 산페이나 타츠미 요시히로 작품은 수입되는데 쓰게 것은 안 나오는 건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 토버모리 2009/04/24 23:53 #

    쓰게가 자기작품이 번역출간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가 더 큰 이유일 것 같지만 그런 정서적인 문제도 있겠네요.
  • hansang 2009/04/23 10:05 # 답글

    일본여행갔을때 쓰게 요시하루 단편 걸작선인가 하는 80년대에 나온 문고본을 북오프에서 구입해서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유명작품은 거진 다 실려있어서 (나사식, 늪 등) 반갑던 차에 "치코" 까지 소개해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쓰게 요시하루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기도 했고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 토버모리 2009/04/24 23:53 #

    닉네임이 바뀌어도 감사금지룰은 그대롭니다 ㅎㅎ. 저도 쓰게 작품 중 손에 꼽을만큼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 다음엇지 2009/04/23 15:00 # 답글

    추천서라고 해야할지 참으로 애매한 동생의 단행본에 실린 글을 보고 깜짝 놀랐었죠. 60년 전후의 코게시와의 동거 생활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었기 때문이에요. 아마 작품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실제로 있었던 경험에서 가져온 것들이겠죠. 거의 은자의 삶을 살았을 것 같은 그지만 자료를 정리해 보면 만만치 않은 양의 인터뷰와 글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일관성이 없는 답변도 있지만) 그도 작가인만큼 남들 못지않은 '자뻑' 이 있는 게지요. ^^ 언젠가 그의 인터뷰들을 다 읽고 난 후에 간접적으로나마 그 속을 이해할 수 있을지 며느리만 알겠지요.
  • 토버모리 2009/04/24 23:55 #

    쓰게 타다오 관련 서적들도 구해보고는 싶지만 요즘 제가 빈궁의 극을 달리는지라...
    자뻑 없으면 작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쓰게도 예외는 아닌가봐요ㅎㅎ.
  • M 2009/04/24 00:17 # 삭제 답글

    서정적이기도 한데 은근히 스릴러의 맛이 느껴졌던 기억이 나네요
  • 토버모리 2009/04/24 23:55 #

    특히 애인이 모종삽으로 뜰을 파헤치는 장면이 그렇죠^^.
  • 효우도 2009/04/24 10:20 # 삭제 답글

    위호지처// 영미권에서는 안습이네요.
  • 토버모리 2009/04/24 23:55 #

    그러게요.
  • 시바우치 2009/04/25 18:36 # 삭제 답글

    저는 왠지 나츠메 소세키의 단편 [문조]가 생각나더군요. 내용과 소재 때문인지 묘사 때문인지...
    그리고 위호지처가 말하는 그런 류의 평들은...문화권 문제라기보단 고전을 고전으로써 읽지 못하는데다가 그런 자신의 문제도 자각 못하는 무식천박한 점이 문제. 가령 고전 흑백영화를 요즘 블록버스터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재단하면서 카메라가 느리고 칼라가 아니라고 욕하는 느낌이랄까요.
  • 토버모리 2009/04/26 15:09 #

    뭐 시라토 산페이 선생도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땐 '이게 뭥미?'라고 반응하셨다고 하니까요ㅎㅎ.
  • 2009/04/26 21:1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토버모리 2009/05/01 00:05 #

    이 블로그는 감사금지입니다. 알만하신 분이^^...
  • 허허 2010/07/16 17:10 # 삭제 답글

    만화 자체가 너무 담담해서 처음엔 뭐지? 하는 마음으로 봤는데 계속 곱씹을 수록 복잡한 감정이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만화였습니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좋은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 MOON 2019/04/12 10:58 # 삭제 답글

    여주인공의 행보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슬픔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군요.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은 문고본을 전권 구매하여 읽어보고 있습니다.

    극화체와 기묘한 이야기의 결합된 만화를 좋아하는 터라..

    물론 몇몇 이야기는 수위가 넘 쌔서 부담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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