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레포리' 역자후기 번역작품들

한국어판에서 빠진 후루야 우사마루의 데뷔 전 단편. 오히려 빠진 편이 나은 것 같기도...


  '파레포리'의 초판 발행일이 2008년 12월이니 거의 만 2년이 다 되어가는 판국에 역자후기는 심하게 늦은 감이 있지만 삼류 만화역자로서 나름 첫 번역작이기도 해서 이렇게 후기를 적어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난 데다가 기억력도 좋지 않은 편이라 번역하던 당시의 느낌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기에 요상망측한 글이 될 확률이 높으니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어느 날 세미콜론이라는 출판사에게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 난 찔릴 만한 일을 블로그를 통해서 하던 중이라, 얼씨구나 하고 나갔다가 덜컥 붙잡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승낙할지 안 할지 3분 정도 고민했지만 결국 호기심에 져서 나가기로 했다. 세미콜론 회사 근처의 맥주집에서 편집부 분들을 뵙기로 했는데 길을 잘 못 찾아서 여러 번 전화를 걸고 받고 하면서 간신히 도착했던 기억이 난다. 

  걱정(?)과는 달리 분위기는 온화했고, 만화이야기랑 업계이야기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난 한국에 정발되었으면 하는 책들을 몇 권 가지고 나갔는데 편집자 분들의 반응은 그저그랬던 것 같다. 무슨 작품들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좀 심하게 마이너한 작품들이었던(지금의 나라면 절대 추천하지 않을 그런 만화들)듯하다. 암튼 대화 도중에 불쑥 K 편집장님이 테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 번역을 맡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셨다. 지금의 나라면 '어이쿠, 감사합니다.'하고 뻔뻔하게 받아들였겠지만 당시의 나는 아직 선량했기에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솔직히 정식역자로서 갑자기 그런 대작을 맡기엔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난 되도 않는 실력으로 다니구치 지로의 모 만화 번역을 하고 있으니 나도 2, 3년 사이에 많이 철면피가 되었구나 싶다.

  자리가 파한 후에 K 편집장님께서 '그럼 '파레포리'를 번역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3분 정도 고민하다가 한 권 짜리인데다 4컷 만화니 괜찮겠다 싶어서 승낙을 했다.'파레포리' 정발에 내가 관여했다는 오해를 몇몇 분께서 하셨는데 실은 그때 이미 계약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이 뻘글을 쓰게 된 동기 중 하나가 이 오해에 대한 해명이다. 암튼, 그렇게 해서 '파레포리' 정식번역을 맡게 되었다. 출간 스케줄이 좀 넉넉한 편이었는지 두 달이 넘는 기한을 받을 수 있었다. 마감이 유도리있는(바른말 고운말을 씁시다) 편이라 번역하는 초반엔 꽤나 여유를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170페이지짜리 만화책에 두 달의 기한이다! 하루에 열 페이지씩만 해도 주어진 기간의 1/3도 못 쓰는 셈이 아닌가. 하지만 진도가 나갈수록...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식번역이니 아무래도 좀 더 긴장이 되었고, 게다가 이 만화에 등장하는 패러디에 대한 역주를 달아야한다는 난관이 닥쳐왔다. 번역을 맡기 전에 이미 읽어본 책이지만 막상 패러디 원본들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니 굉장히 낯설어 보였다. 이 작품의 번역에 쓴 시간의 태반은 패러디 원본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데 소모되었다. 결국 난 어처구니없게도 기한을 사흘 정도 넘기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편집부에서 관대하게 봐준 덕에 별 탈 없이 번역원고를 넘길 수 있었다. 

  번역원고를 넘기고 난 뒤 좀 지나서 교정지가 나왔다. 세미콜론은 교정지가 나온 후에도 역자에게 교정을 볼 기회를 준다. (여담이지만 난 이게 업계 스탠다드인 줄 알았다가 후에 낭패를 보고 폐를 끼치고 한 적이 있다.) 아직 책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내 번역과 만화가 함께 조합되어 있는 걸 보니 신기했다. 그런데 마냥 신기해할 수만은 없었다. 교정지에 얹혀 나온 걸 보니 두 달 동안 꼼꼼하게 진행했다고 생각했던 번역에 온갖 오류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쪽팔린 걸 참으면서 교정을 열심히 보고 다시 편집부에 넘겼다. 역자교정도 끝났으니 이제 책이 나오겠구나 했는데 출간예정이 미뤄지면서 당초 2008년 10월에 나올 책이 12월에나 나왔다. 시작부터 끝까지 개인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셈이다.

  정식 한국어판이 나오기 전부터 컬트였는데 나오고 나서 판매량도 컬트에 걸맞게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전히 홍대 총판에 자리잡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괜시리 흐뭇해진다. 아마 처음 서점에 깔린 걸 보았을 때의 흥분을 깡그리 잊어버리진 않은 탓일 거다. 난 여전히 형편없는 역자지만 그래도 '파레포리' 요 한 권만은 내가 한 것 치고는 괜찮은 번역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라쿠고가 나오는 페이지를 번역하기 위해서 라쿠고 책을 구해보고 친구의 일본인 선생님한테도 문의하거나, 마지막 저자후기의 암호를 열심히 풀었던 시간들이 아예 헛되진 않았구나 싶다. 

-암튼 늦게라도 구입 좀 굽실굽실.

덧글

  • 루이 2010/08/24 22:43 # 답글

    파레포리... 구입해서 보고 후루야 우사마루에게 완젼 빠져버렸습니다...^^ 덕분에 잘 봤어요.
  • 대산초어 2010/08/25 17:55 #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 dcdc 2010/08/24 23:00 # 답글

    대산초어님 번역으로 접한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제 책장 한켠에 고이 모셔놓았습니다 :)
  • 대산초어 2010/08/25 17:56 #

    제가 한 것 치곤 괜찮은 번역이란 소리지 객관적으로 좋은 번역이라곤...
    더 잘하시는 분이 하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우와왕 2010/08/24 23:08 # 삭제 답글

    저역시 심심할때마다 꺼내보는 (재독/삼독/사독은 기본) 파레포리 팬입니다. 이게 다 대산초어님 덕분입니다. 감사하고 있어요~
  • 대산초어 2010/08/25 17:56 #

    제 블로그에서 감사는 금집니다.
    팬이 되실 정도로 좋아하신다니 저도 괜히 기분이 좋네요.
  • evax 2010/08/24 23:20 # 답글

    안 붙잡혀가셔서 다행입니다^^
  • 대산초어 2010/08/25 17:57 #

    말로만 듣던 데꿀멍을 재현할 뻔했네요ㅎㅎ.
  • 흐림 2010/08/25 00:29 # 답글

    처음 볼 땐, 읭? 이게 뭐지, 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난 만화더군요!
  • 대산초어 2010/08/25 17:58 #

    번역할 때 지겹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더군요.
    좋은 만화입니다^^.
  • janejane 2010/08/25 01:15 # 답글

    제 책장에 있지요. 이렇게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으니 재밌네요.
  • 대산초어 2010/08/25 18:04 #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0/08/25 18:54 # 삭제 답글

    오호....... 안그래도 어제였나.. 다시 한번 읽어봤는데(자연을 만끽하는곳에서...;;;) 이제서야 역자 후기를 보게 될줄은 몰랐네요.
    파레포리란 만화는 정말 곱씹어보면 볼수록 새로운 재미를 끼얹는 만화더군요. 그 많은 페러디와 적절한 인용들... 특히나 유명한 화가나 명화들을 차용한 그림들은 제 미천한 소양으로도 가끔 탄성이 나오게하고 거기에다가 이만화가 시초임에 분명한 실험적인 연출들도 아주 좋았습니다. 옴니버스형식으로 관계없을것 같은 이야기임에도 결말에서의 알듯모를듯한 클라이막스도 좋았고.. ^^
  • 대산초어 2010/08/27 14:48 #

    적절한 감상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역자로서 참 기쁘네요^^.
  • 2010/08/26 20: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대산초어 2010/08/27 14:48 #

    기회가 되면 하나씩 올려보려고요^^. 물론 완결작들만요.
    글을 잘 못 써서 읽을만한 글이 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 M 2010/08/26 22:37 # 삭제 답글

    옛날 어떤 영화잡지에서 매니악한 일본만화 7개(번역안된것)를 선정해서 소개했는데 7개중 하나였어요.
    그거 보고 너무 보고싶었는데(예수가 채집되어 있는 그림이 있었어요) 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6개는 어떻게 볼 수 없나 싶어요.
    대부분 기억이 안나지만 그 중에 여자 고등학생들을 병기로 키워서(군대같은게 아니라 말 그대로 땅속에 나무 심듯이 심어 키움) 폭탄으로 사용하는 만화도 있었는데 충격받고(남자들의 소변으로 여고생들이 크거든요) 지금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만 어린 마음에 표현이 충격적이라 아직도 머리속에서 사라지질 않아요ㄷㄷㄷ
  • 대산초어 2010/08/27 14:50 #

    저도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군요.
    혹시라도 그 만화에 대해 알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ㅎㅎ.
  • dodo 2010/09/19 19:51 # 삭제

    저도 그 잡지 보고 샀습니다. FILM 2.0 125홉니다. 근데 그때 제가 중학생이었지요.
    뭐 언젠간 나오겠지 하다가 여기서 보고 샀습니다. 오늘 다시 찾아서 뒤적거리는데 실린 기사 중 하나가 영등위를 밀착 취재한 내용입니다;;;
  • 대산초어 2010/09/21 01:40 #

    실례가 안 된다면 M 님이 언급하신 만화 제목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 dodo 2010/09/23 18:24 # 삭제

    아예 목록을 쭉 불러드릴게요.
    *마루오 지옥 시리즈(신개정판)-마루오 스에히로
    *파레포리
    *역전신부-가고 신타로
    *파라노이아 스트리트-가고 신타로
    *에로이 혼-다마오키 벤쿄
    *DDT-나, 귀 없는 칸바시입니다-마루오 스에히로
    *돌연변이 하나코-아이다 마코토
    *가든(Garden)-후루야 우사마루
    *아이코 16세-가고 신타로 (이거시 M님이 말씀하신 것. 소개된 그림 컷 하나가 밭에 머리들이 심어져 있음.)
    *교내사생 시리즈-유진(U-JIN)
    *퓨어 트랜스(Pure trance)-미즈노 준코
    *아키라(특별판)-오토모 가츠히로
    *아리가토-야마모토 나오키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하기오 모토
    *The world is mine-아라이 히데키
    *이웃사람 13호-이노우에 산타
    *공각기동대2-맨 머신 인터페이스-시로 마사무네
    *애플시드-시로 마사무네
  • dodo 2010/09/23 18:36 # 삭제

    대산초어님 저도 실례가 안 된다면 야마다 하나코의 신의 질 나쁜 장난 자세하게 소개시켜 주시라능^^
  • 대산초어 2010/09/23 23:50 #

    와오, 감사합니다!
    '신의 질나쁜 장난'은 다음에 따로 포스팅을 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2010/08/28 01:2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대산초어 2010/08/31 16:13 #

    블로그 시작한 후 처음 뵙는 역주행 용자(!)십니다.
    조금이나마 유익하셨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
  • pattoy 2010/08/31 10:22 # 삭제 답글

    멋지세요 ㅠㅠㅠㅠ 후기 재미있게 읽다 갑니다. 역시... 제가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정말 부러워요 이쪽 일 계속 열심히 하셔서 입지를 단단히 굳히시길 바랍니당
  • 대산초어 2010/08/31 16:14 #

    pattoy 님쪽 업계가 더 화려하고 드라마틱할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입지를 굳힐 실력도 없고 입장도 아니라서 좀 그렇긴 합니다ㅎㅎ.
  • 123 2010/09/03 13:17 # 삭제 답글

    시스터 제네레이터가 정발됐습니다. 번역퀄리티는 아직 도착을 안해서 모르겠지만.
    사무라 히로아키가 의외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군요. 단행본이 다 나온 걸보면.
    조만간 하루시온 런치도 굽신굽신.

    아, 그리고 대산초어님, 콘 사토시님의 월드 아파트먼트호러와 해귀선 정발에
    출판사에 입김 좀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 대산초어 2010/09/09 14:28 #

    유감스럽게도 제가 밀면 오히려 정발 확률이 떨어지더군요ㅎㅎ.
    그냥 잠자코 있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인 것 같습니다.
  • RR 2010/09/08 16:38 # 삭제 답글

    얼마전에 만화책 사러갔다가 구입했는데 독특한 맛이 있더군요.
    근데 진짜 마니악하긴 했어요.
    역주를 봐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일본인이거나 일본문화를 잘 알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는 걸까요.
    참 아쉬웠습니다.. ㅠ
  • 대산초어 2010/09/09 14:32 #

    근데 그렇게 마니악한가라고 물으면 의외로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이른바 클래식으로 꼽히는 작품들 패러디가 많아서...
  • 지나가던 만화팬 2010/10/05 22:37 # 삭제 답글

    대산초어님이 [파레포리]를 번역하셨다는것을 기억하고 어제 책을 구매해서 읽었는데 참 재밌는 만화더라고요. 덕분에 좋은 만화 소개받았습니다. ^^
  • 대산초어 2010/10/06 11:42 #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꽤나 호불호가 갈리는 만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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