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만화관련

95% 정도 실화일 수 있는 이야기.

좋은 만화를 내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한 불량 편집자 D씨는 인생의 책인 '노란 책-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를 내기 위해서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제는 거의 전작을 한국어판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지만 그가 착수할 때는 동화책 한 권만 나와 있을 뿐, 정작 만화책은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이른바 '예술 만화'를 내고는 있었지만, 워낙 출간시기가 듬성듬성한지라 어느 정도 욕망불만이 지속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것만은 내 손으로 내겠다, 내가 아니면 한국어판 편집을 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의무감? 투쟁심? 같은 게 타게 만드는 책이 타카노 후미코의 걸작 작품집 '노란 책'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건 예전에 잠깐 아르바이트로 만화 번역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출판사 편집장님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본문에 인용된 '티보 가의 사람들' 구절들을 모두 한국어판 '티보 가의 사람들' 기준으로 바꾸는 것을 계약의 사전조건으로 걸고 있었기에 계약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D씨는 시간이 남아서 그랬는지 본문에 인용된 '티보 가의 사람들' 구절을 M사판 '티보 가의 사람들'에 체크해놓았기 때문에 큰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더랍니다. 편집자가 되자 그가 '노란 책'을 낸다는 프로젝트에 착수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편집회의를 통해 '노란 책'을 내기로 결정하고 에이전시에 오퍼 신청서를 내는 D씨의 표정에는 어딘가 자신만만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M사에도 사전에 메일을 보내어 인용허락을 받아놓았으니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 보였습니다. 장년의 꿈 중 하나가 이렇게 실현되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노란 책'의 원 저작사는 수식어로 '천하의'가 붙는 일본의 거대 출판사 K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K사는 오퍼를 반려시켰습니다. D씨가 일하는 출판사는 소설 장르에선 K사의 작품을 많이 냈기에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K사는 만화와 일반 서적 판권 관리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고, 일반 서적을 계약한 실적이 있더라도 만화를 계약한 실적이 없으면 거래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D씨가 다니는 출판사가 만화를 많이 내지 않았던 회사였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지만 D씨는 굉장히 낙담했습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던 D씨는 설득에 들어가기로 합니다. 메일로 설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직감하고 일본에 건너가 K사와 직접 담판을 짓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D씨가 다니는 출판사 사장님은 통이 큰 분이었고, D씨는 다른 출판사 몇 곳과 동경도서전 참관 명목으로 출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이전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K사 말고도 작은 만화 출판사 S사와 실용서 전문인 다른 S사에도 들렀지만 D씨의 머리는 K사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로 꽉 차 있었습니다.

K사 방문은 D씨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될 것입니다. 도쿄 고코쿠지에 있는 K사는 '출판사'라는 곳의 고정관념을 날려버릴 정도로 거대한 곳이었습니다. 거의 한 블럭을 통째로 쓰는 것 같은 거대한 출판 제국이 눈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D씨는 그제서야 왜 K사 앞에 '천하의'라는 수식어가 붙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D씨는 에이전트와 함께 K사에 들어가 판권 담당자인 H씨를 만났습니다. H씨는 유학 경험이 있어 한국어가 매우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어를 다 알아듣기에 D씨는 한국어로 말하고, H씨는 일본어로 말하는데 의사소통이 되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좀 웃길 미팅이 되었습니다.

H씨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D씨가 다니는 출판사는 만화 실적이 많지 않기에, 어떻게 책으로 만들 것인지 예측이 가지 않는다. 이런 불확실성을 가지고 담당 만화 편집자를 설득할 수가 없다. D씨는 열심히 항변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만듦새가 그리 떨어지진 않는다. 그렇게 불안하다면 중간중간 피드백을 받고서 진행하겠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미팅 끝에 H씨는 "그럼 한번 해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D씨는 일본에 온 보람이 있었다며, 8부 능선을 넘었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뒤에 받은 K사의 답변은 D씨를 절망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라는 답변이 왔던 것입니다. 이때 그는 K사를 날려버릴 폭탄을 어떻게 수배해야 할지 고민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안 되는구나'라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이때 D씨가 다니는 출판사 사장님이 다른 방향의 안을 냈습니다. 그것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같은 작가의 작품을 출간함으로써 K사의 거절 명분을 없애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대가 하나'라는 타카노 후미코의 T사에서 나온 작품을 계약했습니다. T사도 까다롭게 나오면 어떡하나 했었지만 너무나도 쉽게 OK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막대가 하나'의 한국어판을 출간할 수 있었지요(이에 대해선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이제 어느 정도 명분이 생겼다고 생각한 D씨는 K사를 다시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첫 오퍼로부터 2년이 되었을 무렵에 드디어 계약을 해주겠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D씨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해보시기 바랍니다. 뭐 짐작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그렇게 계약에 성공하자 D씨는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편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더니 늦어진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늦어진 동안에 일본에도 만화 디지털 서비스의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을 타고 '노란 책'의 고품질 데이터가 만들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려고 신인지 뭔지(있다면)가 늦게 계약되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D씨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믿을 만한 번역가 선생님, 고품질 데이터, 그리고 이글대는 본인의 욕망을 삼신기처럼 갖추고 편집에 들어갔습니다.

'티보 가의 사람들' 일본어판은 아주 예전 판이어서 그런지 의역이 굉장히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찾아놓은 구절이 해당 구절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것도 새옹지마라고 해야 할지, 기다리는 동안에 '티보 가의 사람들'이 저작권이 만료되어 퍼블릭 도메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D씨는 인터넷에 통째로 올라와 있는 불어판 원서(그러나 그는 불어를 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를 사전과 번역기의 도움을 얻어서 더듬더듬 찾아가며 확인을 해갔습니다. 

이제 정리된 원고는 디자이너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기대를 120% 이상 넘기는 훌륭한 작업을 해주었습니다. 표지도 단번에 OK가 났습니다. 남은 건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였지요. 그래서 평가는 어땠냐고요? 일단 증정본을 받은 저자 타카노 후미코 선생님은 책이 만족스럽다고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천만화대상 해외작품상을 수상해서 상금을 타카노 후미코 선생님께 드릴 수 있었고요. 그리고... 그리고... 아직 초판이 다 팔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리네요.

D씨는 그 후로 반쯤 성불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중쇄 찍을 때쯤 성불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덧글

  • 다음엇지 2019/03/21 21:14 # 답글

    기다렸답니다!
  • 대산초어 2019/03/25 17:59 #

    별것 하는 거 없는데 안 쓰다 보니 블로그에 뭘 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다음엇지 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도 준비는 하고 있는데... '노란 책'만큼 편집자 D씨를 괴롭힐 듯하네요.
  • ㅇㅇㅇ 2019/03/22 10:10 # 삭제 답글

    안 그래도 소설 문구 번역 때문에 매우 힘드셨을 것이라는 짐작이 있었지만..이런 엄청난 노고가 있었군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중쇄를 몇번이고 해서 성불하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 대산초어 2019/03/25 18:01 #

    실제로 고생한 건 별로 없다고 하네요. 그냥 기약 없는 희망고문 때문에 괴로웠을 뿐이라고... D씨의 성불은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성불... 성불... 성불을 하자.
  • 고글 2019/03/22 20:30 # 답글

    몇 년 전 막대가 하나를 접하고 크게 감명 받은 뒤 후일에 노란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구매하고 읽었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었군요. 좋은 만화를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산초어 2019/03/25 18:04 #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고 싶은 건 많은데 생각보다 어른의 사정이 많이 태클을 거네요. 아, D씨의 이야기입니다.
  • 빵코 2019/03/25 15:20 # 삭제 답글

    정말 마음 고생 심하셨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다만 뒷 얘기가 조금 씁쓸한 것만 빼면.. 많은 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좋은 책 여럿에 추천하겠습니다.
  • 대산초어 2019/03/25 18:04 #

    감사합니다ㅜㅜ 빨리 D씨를 성불시켜야...
  • MOON 2019/04/12 10:31 # 삭제 답글

    이전에 "막대기 하나"를 굉장히 인상깊게 본 터라

    "노란 책" 발매를 손꼽아 기다리다 매우 즐겁게 읽었습니다.

    덕분에 타카노 후미요의 광팬이 되었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ㅇㅇ 2019/05/05 00:42 # 삭제 답글

    저는 책 진짜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다른 타카노 후미코 작품은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노란책은 저에게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꼭 책이 잞 팔렸으면 좋겠네요.. 갑자기 타카노 후미코 작품이 연달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데 좋은 영향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 우론당 2019/07/25 00:44 # 삭제 답글

    대산초어님이 성덕(?)이 되셔서 덕분에 타카노 후미코 작품을 줄줄이 읽게 된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오래전에 이 블로그에서 타카노 후미코 인터뷰를 보고, 마음 한켠에 새기고 있었어요. 블로그 예전만큼 안하셔서 아쉽지만 항상 좋은 만화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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